여교사와 무명시인의 약속 - 이환희씨, 김응관 유고집 '나는 벙어리' 발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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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30여년전 일이다.당시 초등학교 교사였던 이환희(74)할머니는'소화회'(小花會)라는 봉사단체를 만들고 병이 깊어 오갈데 없는 사람들을 찾아나섰다.그리고 전남여수의 작은 결핵촌에서 김응관이라는 사람을 만났다.

32년생인 김씨의 고향은 함북성진.혼자 월남해 객지생활을 하다 병이 들자 결핵촌까지 오게 됐다.한달에 한번씩 과일등을 싸들고 환자촌을 방문했던 할머니는 이곳에서 눈이 하늘처럼 맑았던 김씨와 인연을 맺게 된다.김씨는 틈틈이 시와 수

필을 쓰며 병마(病魔)와 싸우고 있었다.두 사람은 자연스레 편지를 주고 받았고 할머니는 김씨의 글을 모아 꼭 출간해주겠다고 약속했다.그리고 지난 71년 결핵촌을 다시 찾았을 때 김씨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할머니는 최근 그때의 약속을 지키는 뜻에서'나는 벙어리'(둥지刊)라는 김씨의 유고집을 출간했다.30년만에 어렵게 지킨 약속인 셈이다.책에는 불행을 겪은 사람의 아픔과 이를 문학으로 극복하려는 시와 수필등이실려 있다.

“나는 할말이 많아서 벙어립니다//(중략)하도 할말이 많아서/이렇듯 비분을 삼킨 연후에/외로이 선 바위입니다.”('나는 벙어리'에서)

“지팡이를 짚고 겨우 걸음마라도 하게 되었으니 다음에 소화님들이 오실 때는 같이 풀밭이라도 걸을 수 있을 것입니다.”(편지의 일부)

1백20여쪽의 작은 분량이지만 두 사람의 특별한 사연만큼 책속에는 따뜻한 사랑이 잔잔하게 흐르고 있다.이환희씨는“김씨 고향이 북쪽이라 남북교류 소식이 들릴 때마다 김씨와의 약속이 천금(千金)의 무게로 늘 가슴에 남아 있었다”고 말

한다. 〈박정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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