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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급조치 세대의 역사 되찾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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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이하경 기자 중앙일보 대기자

1979년 1월의 일이었던가. 대학 2학년생 L군은 이른 아침 집에서 두 사람의 정보과 형사에 의해 연행됐다. 긴급조치 9호 위반이라고 했다. 학회를 재건하기 위해 합숙모임을 가졌던 일, 장기간 수감돼 있던 유인태.이철 등 학생운동가들의 석방을 촉구하고 유신체제를 비판하는 유인물을 돌렸던 일, 술집에서 박정희를 성토했던 격한 언사가 모두 조사대상이었다. 김수영과 신동엽.김지하를 좋아하고, 민주주의를 갈망한 자유주의자였지만 체제를 위협하는 불온한 인물로 취급됐다. 고문기술자들은 L군의 두 손을 뒤로 해 수갑을 채운 뒤 둔기로 '죽지 않을 만큼' 때렸다. L군은 피투성이가 된 채 풀려났지만 몇 달 동안 계단을 오르내리지 못할 정도로 몸이 망가졌다. 그리고 강요된 침묵과 은둔의 시기를 거쳐 군에 입대했다.

L군은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기자다. 주로 73~79학번인 긴급조치 세대들이 '잃어버린 역사'를 되찾겠다고 나섰다는 소식에 26년 전의 기억이 되살아난다.

73년 발동되기 시작한 긴급조치 1, 2, 4, 7호의 종합판인 긴조 9호가 발동된 것이 75년 5월 13일이다. 올해로 30년을 맞는 것이다. 긴조세대가 뒤늦게나마 역사를 복원하겠다고 한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철저한 언론통제로 자신들이 한 일을 제대로 알릴 수 없었던 세대, 그래서 숱한 고난과 헌신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조명받지 못한 무명의 세대였기 때문이다.

긴조세대는 '무엇이 될 것인가'를 계산하지 않고,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한 순수한 열정의 집단이었다. 이들을 괴롭힌 긴조 9호는 유신헌법을 반대하는 사람을 법원의 영장 없이 체포할 수 있게 한, 기막힌 탄압의 도구였다. 그들은 한번 낙인 찍히면 영원히 사회로부터 격리되는 엄혹한 상황, 단 한줄기의 빛도 비춰지지 않던 칠흑 같은 시대를 온몸으로 거역한 순결한 젊음이었다. 운동가요 '님을 위한 행진곡'의 가사대로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세대였던 것이다.

70년대 긴조세대가 줄기차게 전개한 민주화운동은 80년대 한국 민주화의 성공을 결정적으로 뒷받침한 토양이 됐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다만 이 시대를 제대로 정리하려면 '2005년의 한국'이라는 달라진 상황에서 자신들이 어떤 역할을 할지를 먼저 고민해야 한다. 문민정부가 수립되면서 형식적 민주화는 이뤄냈지만 민주주의의 실질적 내용을 갖추지 못한 가운데 집단 간 갈등이 깊어가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따라서 민주주의의 성숙과 공동체의 통합이 긴요한데, 계산을 모르는 순수한 열정의 긴조세대야말로 이런 과제의 최적임자인 것이다. 더구나 40대 후반과 50대 초반의 원숙한 책임감까지 갖추고 있지 않은가.

역사 정리의 방향과 내용도 중요하다. 과거의 역사가 미래를 열어가는 나침반이 되기 위해서는 대결했던 상대방의 입장과 의도까지 헤아라는 열린 자세가 필요하다. 가령 박정희식의 국가테러리즘이 자유와 인권을 짓밟던 시기인 70년대 중반에 남한의 1인당 국민소득이 북한을 추월했다는 사실은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정치적 자유의 억압과 경제적 성취를 동시에 살펴야 다수가 인정하는 공정한 정리가 가능할 것이다.

긴조세대와 첨예하게 대립했던 보수세력의 협조도 필요하다. 프랑스의 나치 협력자 청산 작업은 좌파가 아니라 드골이 진두지휘한 보수우익이 주도했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70년대 긴조시대의 정리가 또 다른 분열의 시작이 아니라 미래를 향한 통합과 전진의 과정이 되기를 바란다.

이하경 정책사회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