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원로 국학자 이훈종박사가 지적하는 史劇속의 엉터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7면

사극은 또하나의 역사 교과서다.정사(正史)냐 야사(野史)냐 차원의 문제와는 별개로 당시 시대상과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생생한 교육의 장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여기엔 어려움이 하나 있다.바로'고증'이다.기록이 부실하고 시간과 돈이 부족한 제작현실에서 정확히 제대로 재현하는지에 대한 의문은 속시원한 해결이 어려운 문제다.

원로 국학자 이훈종(李勳鍾.79)박사도 사극을 볼 때마다'저게 아닌데'라며 안타까웠던 적이 한두번이 아니다.자녀들은 TV에서 사극만 나오면“우리 아버지 혈압오른다”며 아예 채널을 돌리기 일쑤다.

그럼에도'국학도감'(일조각).'민족생활어 사전'(한길사)등 전통문화 서적을 직접 그림까지 그려가며 꾸준히 펴내는 이박사에겐 점점 사라지는 우리 것들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 남아 있다.이박사는 그동안 사극 드라마에서 나타난'옥에 티'

를 몇가지 얘기했다.

우선 이박사는 무관이 칼을 허리띠에 차고 다니는 모습은 잘못됐다고 지적한다.장수의 속옷 왼쪽 겨드랑이 부분엔 칼을 거는 고리가 있어 여기에 칼을 차고 다녔고,그래서 쉴 때 갑옷은 벗어도 칼은 늘 지닐 수 있었다는 것이다.

두번째는 망건 위에 하는 관자(貫子)의 위치.흔히 관자놀이 부분에 있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뒤통수쪽에 있어야 제대로 된 것이라고 말한다.

박동진 명창의 관자가 제대로 된 것이라고 말하는 이박사는 일종의 계급장이기도 했던 관자는 직급이 높아질수록 작고 단순해져 사치를 경계하는 조상들의 씀씀이가 엿보이는 물건이라고 언급했다.

흔히 손으로 들고다니는 가마는 기실 가마에 매인 끈을 어깨에 메고 다녔다.손으로 들어서는 얼마 들고가지 못했기때문.얼마전'찬란한 여명'에선 대원군이 물건을 주로 나르는데 쓰인 가마바탕을 타고 가는 모습이 나와 실소를 금치 못했다고

밝혔다.

네번째로 직사각형판에 구슬이 달린 면류관(冕旒冠)과 면복은 임금이 종묘대제나 사직대제등 제사 지낼 때만 입는 옷.그런데 한 드라마에서 영조가 사도세자를 벌할 때 이 차림을 하고 나와 깜짝 놀라기도 했다.

최근 KBS1'용의 눈물'에서 병석에 누운 강씨 옆에 이성계가 집무복인 익선관(翼蟬冠)을 쓰고 곤룡포를 입은 채 지내는 모습이 나오는데 이는 안방에서 계속 양복을 입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지적했다.

여섯번째 왕이나 왕비는 계단을 직접 오르는 경우가 없었다.귀인들의 경우 반드시 내시나 궁녀의 부축을 받으며 들려 올라갔다는 것이다.

일곱번째는 호칭문제.대감이란 호칭은 정이품까지,영감은 정삼품 당상관 이상까지,정삼품 당하관 이하는 진사 또는 나으리라고 부르는데 이를 혼용하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했다.

이밖에 나이 삼십이 넘은 사람이 갓 면도한 매끈한 얼굴로 등장하는 것은 수염을 깎지 않았던 선조들의 생활을 도외시한 것이라는 이박사는“뭐든지 무심코 보아넘기지 말라”며 우리 것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을 당부했다.

이와 관련,KBS1 대하사극 '용의 눈물'의 윤흥식 부주간은 지난달 15일 이박사를 모시고 고증 강의시간을 마련했다.예순두살의 김재형 PD를 비롯해 연출.의상.분장.미술.소품등 40여명의 전제작진은 이박사의 구수한 강의와 열띤 토

론으로 두시간을 보냈다.

윤부주간은“미처 제대로 만들지 못한 부분이 많았는데 이번 강의를 통해 많이 배웠다”고 밝히고“앞으로 이런 고증 강의를 매달 한차례씩 하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정형모 기자〉

<사진설명>

조선시대 무관들은 칼을 왼쪽 겨드랑이에 차고 다녔다는 것이 이훈종박사의 지적이다.사진은 칼을 허리에 차고가는 장수가 등장한 KBS'용의 눈물'의 한 장면.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