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브이세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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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0면

봉화와 몇 번 만나면서 데이트를 하고 육체적인 관계도 맺고 하는 과정에서 구환은 엉뚱하게도 자기 아내 원지가 다른 남자를 만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일종의 의처증에 시달리게 되었다.원지도 구환 자기가 직장으로 출근하고 나면 야

근 근무시의 봉화처럼 낮에는 집에 혼자 있게 되는 셈이었다.아니,혼자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는 기회가 얼마든지 주어지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마누라도 같이 정신없이 직장생활을 해야 한다니까.이런 생각을 시시때때로 해보는 구환은 오히려 직장생활을 핑계로 원지 몰래 봉화와의 만남을 가질 수 있었으므로 막상 원지가 직장생활을 한다 하더라도 구환의 의처증은 수그러들

리가 없었다.어쩌면 원지가 직장생활을 하지 않을 때보다 의처증이 더 심해질지도 몰랐다.

봉화와 사귄지 석달쯤 될 무렵,구환은 드디어 집의 전화기에 도청기를 연결하게 되었다.그 도청기는 외부 전화선에 연결하여 녹음을 하는 것으로 구환은 자신의 전공을 잘 살려 도청 녹음기를 교묘하게 화장실 합판 천장 위에 설치해두었다.

천장에는 가장자리에 이전부터 주먹 하나가 드나들 만큼 구멍이 나 있었는데,그 구멍으로 소형 녹음기를 집어넣었다 끄집어내었다 하면되는 것이었다.

구환은 도청 녹음기 테이프를 원지 몰래 들어보았으나 다른 남자와 사귀고 있다는 혐의를 잡을 만한 통화를 아직까지는 포착하지 못하였다.다른 남자와 원지가 통화를 한 내용이 녹음되어 있기도 하였지만,그런 경우는 대개 복덕방 아저씨나

애프터 서비스맨,은행 직원,동사무소 직원 등이 고작이었다.그래도 언젠가는 혐의를 잡을 것이라는 집념으로 매일같이 화장실 변기에 쪼그리고 앉아 이어폰을 끼고 테이프를 들어보는 구환이었다.

그러다가 구환은 자기가 사귀고 있는 봉화마저도 다른 남자와 만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봉화의 전화기에도 도청 녹음기를 설치하였다.옥상에는 물탱크,환풍기,냉난방기 부속 장치,안테나 등 여러 시설물들이 놓여 있으므로 도청 녹음기를

숨기는 데 훨씬 수월한 편이었다.

봉화도 이전 애인과 말다툼 비슷한 통화를 몇 번 했을 뿐 다른 남자와 사귀고 있다는 혐의를 잡을 만한 통화는 없다고 할 수 있었다.구환은 이래저래 이중(二重)의 의처증(애인을 의심하는 증세도 의처증의 일종으로 친다면)에 빠져 허오馨킹홱?우선 방송국 직원들 중에 바람난 아내,바람난 애인 때문에 고민하는 사람이 제법 있어 그런 이야기를 주워듣다 보니 구환의 증세는 더욱 심해지기만 했다.

구환이 원지와 통화한대로 퇴근하기가 무섭게 집으로 달려가 좀도둑들이 들어왔다는 방안 현장을 살펴보고,원지가 저녁 반찬거리를 사려고 시장으로 간 사이에 화장실에서 도청 녹음기를 꺼내어 들어보았다.그런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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