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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풍경] 히말라야 15좌 등정 산악인 엄홍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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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핑, 피~잉'.

옆으로 총알소리를 내며 작은 돌들이 떨어진다. 겁이 난다. 발걸음이 무겁다. 숨도 차다. 그래도 어떻게든 정상을 밟고 살아서 내려가야겠다는 일념으로 발을 뗀다. 진한 고독감이 밀려온다. 아직은 살아있다는 증거다. 입으로 히말라야의 모든 신과, 함께 동행하다 생을 마감했던 악우(岳友)들의 이름을 되뇌며 도와달라고 부탁한다.

'작은 탱크' 엄홍길(嚴弘吉.44.트랙스타)대장이 지난 17일 히말라야 얄룽캉(8505m)을 등정하고 돌아왔다. 시커멓게 탄 얼굴에 갈라진 입술, 그리고 볼이 쏙 들어간 것을 보니 "이제까지 떠났던 35번의 히말라야 원정 중 이번처럼 어려웠던 적은 없었다"는 말이 엄살은 아닌 듯싶다.

산악인 엄홍길은 타고난 산꾼이다. 산악인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모산(母山)이 있게 마련이다. 알프스의 돌로미테가 히말라야 8000m 고봉 14좌를 처음 완등한 라인홀트 메스너의 모산이라면 엄홍길의 모산은 도봉산이다. 어린 시절 뒷마당처럼 뛰어놀던 도봉산에서 등반가의 꿈을 키우며 등반기술을 다졌다. 그리고 1988년 에베레스트(8850m) 등정을 시작해 2000년 7월 31일 K2(8611m)를 마지막으로 14좌 완등을 마쳤다. 그때 엄대장은 히말라야에 대한 또 다른 도전 계획을 세웠다. 다름아닌 '14 + 2'. 그 첫번째가 이번 얄룽캉 등정이다.

"일부에서는 14좌니 16좌니 말도 많지요. 산악계에서는 히말라야 8000m 16좌를 인정하지 않지요. 여기에는 저도 동감입니다. 그러나 등반 가치가 있고 여러가지 정황을 따져볼 때 제 나름대로 독립봉이라고 생각하기에 '14 + 2'를 계획했다"며 "이것은 인생의 꿈이자 새로운 도전"이라고 설명한다.

그는 이번 원정 때 캠프3(7300m)에서 강풍으로 나흘간 발목이 잡혔다.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로 바람이 심하게 불었어요. 1평 남짓한 텐트에서 대원 세명이 4일을 버티려니 나중에는 연료와 식량도 바닥이 나고 탈진 상태가 되더라고요. 귀신이 울부짖는 듯 강풍이 텐트를 할퀴고 지나가면 잠은 멀리 도망가고 소름마저 돋았어요. 그래도 그동안의 경험을 바탕으로 확신이 섰기에 정상 등정을 감행했다"며 "천신만고 끝에 정상을 밟았을 때는 '울컥' 눈물이 쏟아지면서 16년 전 에베레스트 정상에 첫발을 내디뎠을 때와 같은 감정을 느꼈다"고 말한다.

"열시간의 사투 끝에 물 한모금 마시지도 못하고 밟은 정상이지만 다시 내려가야 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다리는 풀리고 밑을 내려다 보면 천길 낭떠러지. 그냥 주저앉고 싶을 때가 한두번이 아닙니다. 그래도 살기 위해 내려와야겠지요. 죽음에 대한 공포가 더 크니까요. 인간사도 다 그런 이치 아니겠어요."

맞다. 고산 등반가가 영원히 정상에 머무를 수는 없다. 다시 내려와야만 한다. 위에 있는 것은 아래에 있는 것을 알지 못한다. 아래에 있는 것도 위를 알지 못한다. 오르면 보이고 내려오면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올랐던 자는 무엇인가를 보았을 것이다. 그러기에 프랑스의 산악문학가인 르네 뒤말은 '위에서 본 것에 대한 기억을 가슴에 안고 아래에서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등산의 예술'이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참 희한하데요. 사람이 위기에 처하면 도와주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이지요. 그러나 히말라야는 '신의 영역'에 발을 디뎌놓은 인간의 어려움은 아랑곳하지 않고 예부터 그래왔듯 거대한 빙탑을 무너뜨리고 돌무더기와 눈을 아래로 쏟아붓지요. 그래서 항상 겸허한 마음으로 자연을 대해야 하지요. 마음을 비워야 또 다른 세계가 보이니까요."

그러면서 그는 '산을 좀더 잘 알게 되고 그것을 자신의 일부처럼 받아들이게 되면 인간의 내면에 잠재하고 있는 공격성은 많이 둔화된다. 인간이 인간과 투쟁할 때는 질투.사기.좌절.쓰라림.증오 같은 것을 배우게 되지만 인간이 산과 투쟁할 때 인간은 자신보다 거대한 존재 앞에서 고개 숙일 줄 알게 되고 그런 과정을 통해 평온.겸허.품위 같은 것을 배우게 되는 것'이란 미국의 산악인이자 대법관이었던 윌리엄 오 더글러스의 말을 상기시키며 "인류의 앞날은 자연과 환경을 얼마나 사랑하는가에 달려 있다"고 강조한다.

엄대장은 그동안 히말라야를 35번 도전해 19번 등정에 성공했다. 이제까지 그가 오른 히말라야 산의 높이는 성공을 했건 실패를 했건 평균잡아 한번에 8000m를 올랐다고 쳐도 280㎞를 오른 것이다. 고산 등반은 위대한 행위다. 무엇인가를 만들어내지는 않지만 고도의 정신력을 요구하는 행위와 도전 자체가 위대한 것이다. 죽지 않기 위해 온 힘을 쏟아야 하고 언제나 최선을 요구하기에 멋진 것이다.

아무리 자신의 가장 아름다운 정열과 청춘을 바치고 이 세상에서 받지 못하는 그 어떤 보수를 산에서 받는다고 하지만 목숨을 담보로 해야 하는 그곳을 그는 왜 찾는가. 산을 정복하기 위함일까? 아니면 영웅이 되기 위함일까. 아니다. 두려움과 처절한 고독감을 통해 히말라야를 새롭게 느끼고 이를 통해 어린이에게 꿈과 희망, 그리고 도전정신을 심어주기 위해 설산으로 떠나는 것이다.

이제 엄대장 앞에는 '14 + 2'의 종착역인 로체샤르(8400m)만이 남아있다. 2002년에 이어 지난 해 가을 정상을 눈앞에 두고 두명의 후배를 묻고 와야만 했던 그곳. 그는 올 가을 마지막 종착역을 향해 떠난다.

그 뒤의 목표에 대해 엄대장은 이렇게 설명한다.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많지만 두 가지 일을 계획하고 있어요. 하나는 이제까지 히말라야에서 등반하다 먼저 간 산악인들의 유족을 위한 장학사업 등을 펼쳤으면 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세계 유명 산악인을 초청해 남과 북을 잇는 지리산에서 백두산까지 백두대간을 종주해 조국의 산하를 그들에게 보여주고 또한 통일의 자그마한 주춧돌 역할을 했으면 합니다."

인간이 이상이라고 여기는 것은 이루려고 해도 이루지 못한 목표다. 인생에 있어 불가능이란 꿈은 없다. 희망이 있으면 꿈은 이뤄지는 법이다. 이제 또 하나의 목표를 향한 도전이 엄대장 앞을 기다리고 있다.

글=김세준 기자
사진=박종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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