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실명제 변화-종합과세 회피형 상품 잇단 허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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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금융실명제라고 해서 다 똑같은게 아니다.93년8월 김영삼(金泳三)대통령은 개혁의지를 내세워 최강의 카드를 뽑았었다.노태우(盧泰愚)정권 때부터 검토해왔던 실명제는'과거는 묻지 말자'는 전제 아래 향후 10년에 걸친 점진적 실명제였으

나,金대통령은 검은돈의 발본색원이라는 개혁의지를 내세워 단번에 해치우는 개혁정책을 택했던 것이다.

따라서 금융실명제의 보완 필요성은 도입 당시부터 논란이 됐었다.소위 흑묘백묘(黑猫白猫)론이다.검은 돈이든,깨끗한 돈이든 경제 살리는데 무슨 상관이냐는 논리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실명제가 도입된 93년부터 경기가 회복되기 시작하면서 이런 주장은 자연히 사그라들었다.뒤늦게나마 95년12월 분리과세를 선택할 수 있는 5년이상 장기저축의 범위를 확대했지만,분리과세를 선택할 경우 이자소득에 대한

원천징수세율이 30%(일반예금 15%)나 돼 종합과세 대상에서 빠질 수 있다는 점 외에 세금 혜택은 별게 아니었다.

그러나 경기가 본격적인 내리막길에 접어들기 시작하자 상황이 달라졌다.경상수지 적자는 계속 불어나고 국내 저축률은 떨어지자 실명제와 종합과세가 경제난의 주범으로 몰린 것.

결국 지난해 10월 비과세 가계장기저축이 새로 만들어졌다.이 예금은 가입한도가 월 1백만원이기 때문에 종합과세 대상자가 빠져나갈'구멍'치고는 작지만 어쨌든 정부가 그동안 절대 안된다던 종합과세 회피형 상품의 신설을 처음으로 허용한

것이었다.

그런데도 경상수지 적자가 계속 불어나자 종합과세는 물론 실명제까지 피할 수 있는 무기명 장기채권을 발행하자는 주장이 야당(諸廷坵의원)에서까지 나왔다.버티던 정부는 10월말 또 한발짝 물러나 만기 12년이상인 사회간접자본(SOC)채

권을 발행키로 했다.무기명채권은 도저히 안되겠고 그대신 종합과세대상에서 제외시켜 주는 장기채권(분리과세 15%적용)을 만들어주는 선에서 타협을 본 것이다.

올들어 한보사태가 터지자 흑묘백묘론은 더욱 힘을 얻었다. 결국 정부는 분리과세 대상 장기채권.저축의 범위를 확대하고 증여.상속세가 전액면제되는 종합과세 회피 상품을 허용하고 말았다.

금융실명제가 경제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에 대한 정확한 분석은 없다.그러나 출처의 노출을 꺼리는 돈들이 현실적으로 상당한 규모고,실명제 실시이후 오히려 지하경제 규모가 더 커지고 있다는 분석(조세연구원)은 여러가지 문제점을

시사하고 있다.

과소비를 부채질하는 요인으로 지적되는가 하면,특히 실명제를 피해 해외로 도피하는 돈의 규모가 상당할 것으로 전문가들은 추측하고 있다. 〈정경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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