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적을 남기려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다.평범한 사람들이 족보에 이름 석자를 올려 자신의 존재를 기록한다면,예술가들은 그보다 많은 시간을 들여 드넓은 공간에 자신의 영혼을 새긴다.그러나 산더미처럼 쌓인 예술작품중 창조자와 정확하게 동일시 될 수 있는 작품이 있을까.
장르라는 틀과 시대정신이라는 내용은 끊임없이 작가를 긴장시키며,그 긴장은 작가의 욕망과 꿈을 비틀어놓기 십상이다.그래서 예술가들은 공식적으로 발표된 작품들 외에 메모나 창작노트,혹은일기 따위를 남기는지도 모른다.이것들은 예술가들 의 진솔한 고민이나 삶의 무늬를 날 것으로 살필 기회를 부여한다.특히 예술가의 유고일기는 웬만한 소설보다 흥미진진하고 재미있다.
초등학교 시절 나는.안네의 일기'에서 나치에 대한 불타는 적개심 따위를 배우지 않았다.대신 안네가 숨어지낸 그 어두컴컴하고 좁은 방을 부러워했다.사실 안네의 삶은 쥐죽은듯 조용하고* 지루할 뿐이었다.하지만 안네에겐 수많은 일을 공상 할 시간과 그 공상을 글로 옮길 공간이 있었다.
정규교육을 받으며 매일매일 이해못할 공식들을 외워야 했던 나로서는 그 작은 몽상의 공간이 못내 그리웠던 것이다.
대학원 시절 읽은.행복한 책 읽기'는 지나치게 단정해서 처음엔 조금 불쾌하기까지 했다.그러나 김현은 이 유고일기를 통해 죽음에 맞설 수 있는 하나의 방식으로 책읽기를 위치지웠다.그는죽음이 다가올수록 죽음을 다룬 책들에 더 집착했 고,그 책속에서 죽음을 사유하고 다스리고 넘어설 방법을 찾아 헤맸다.
육체는 비록 죽음과의 싸움에서 패했지만 그가 남긴 일기는 아직도 그 죽음의 심연과 싸우고 있는 것이다.절망을,절망을 찾아 읽다가 그 절망이 끝내 희망으로 바뀌지 않고 그대로 스러진후 이제 나는 그의 단정함이 죽음을 맞는 그만의 방식임 을 안다.
그리고.타르코프스키의 순교일기'를 읽었다.경건함에 대한 갈망으로 가득찬 글이다.그는 소비에트의 물질주의에 맞서 그리스정교로부터 이어져 내려온.영혼'의 위대함을 옹호하고 있다.사소한 사물과 순간들에 대한 한결같은 마음,신념이 체화되 어 일상생활에 녹아흐르는 풍경을 만나기란 쉽지않다.그가 암시하는 것처럼 근대는.인간다움'을 창조하겠다는 계몽의 신념이 인간을.자본의 노예'나.피가 흐르는 물질'로 만든 시대인지도 모른다.그는 예술만이(특히 영화) 이런 오류를 수정할 수 있다고 했고,따라서예술작품을 만드는 전체과정으로부터 자신이 조금도 소외되지 않기를 갈망했다.
일기는 과거의 흔적이자 내일을 향한 다짐이다.모든 사람이 예술가가 될 수는 없지만 누구나 일기를 써서 자기 자신과 가족,나아가 후손들에게 성실하고 진지한 삶을 증언할 수는 있다.오늘이라도 당장 일기장을 펼쳐놓고 소중한 나의 삶을 또박또박 문자로 옮기면 어떨까.그리고 누군가의 노*랫말처럼 10년쯤 지나 그일기를 꺼내 읽는다면? 자 모두들! 일기를 씁시다.
김 탁 환 (소설가겸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