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로보고세로읽기>흔적을 남긴 사람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6면

흔적을 남기려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다.평범한 사람들이 족보에 이름 석자를 올려 자신의 존재를 기록한다면,예술가들은 그보다 많은 시간을 들여 드넓은 공간에 자신의 영혼을 새긴다.그러나 산더미처럼 쌓인 예술작품중 창조자와 정확하게 동일시 될 수 있는 작품이 있을까.
장르라는 틀과 시대정신이라는 내용은 끊임없이 작가를 긴장시키며,그 긴장은 작가의 욕망과 꿈을 비틀어놓기 십상이다.그래서 예술가들은 공식적으로 발표된 작품들 외에 메모나 창작노트,혹은일기 따위를 남기는지도 모른다.이것들은 예술가들 의 진솔한 고민이나 삶의 무늬를 날 것으로 살필 기회를 부여한다.특히 예술가의 유고일기는 웬만한 소설보다 흥미진진하고 재미있다.
초등학교 시절 나는.안네의 일기'에서 나치에 대한 불타는 적개심 따위를 배우지 않았다.대신 안네가 숨어지낸 그 어두컴컴하고 좁은 방을 부러워했다.사실 안네의 삶은 쥐죽은듯 조용하고* 지루할 뿐이었다.하지만 안네에겐 수많은 일을 공상 할 시간과 그 공상을 글로 옮길 공간이 있었다.
정규교육을 받으며 매일매일 이해못할 공식들을 외워야 했던 나로서는 그 작은 몽상의 공간이 못내 그리웠던 것이다.
대학원 시절 읽은.행복한 책 읽기'는 지나치게 단정해서 처음엔 조금 불쾌하기까지 했다.그러나 김현은 이 유고일기를 통해 죽음에 맞설 수 있는 하나의 방식으로 책읽기를 위치지웠다.그는죽음이 다가올수록 죽음을 다룬 책들에 더 집착했 고,그 책속에서 죽음을 사유하고 다스리고 넘어설 방법을 찾아 헤맸다.
육체는 비록 죽음과의 싸움에서 패했지만 그가 남긴 일기는 아직도 그 죽음의 심연과 싸우고 있는 것이다.절망을,절망을 찾아 읽다가 그 절망이 끝내 희망으로 바뀌지 않고 그대로 스러진후 이제 나는 그의 단정함이 죽음을 맞는 그만의 방식임 을 안다.
그리고.타르코프스키의 순교일기'를 읽었다.경건함에 대한 갈망으로 가득찬 글이다.그는 소비에트의 물질주의에 맞서 그리스정교로부터 이어져 내려온.영혼'의 위대함을 옹호하고 있다.사소한 사물과 순간들에 대한 한결같은 마음,신념이 체화되 어 일상생활에 녹아흐르는 풍경을 만나기란 쉽지않다.그가 암시하는 것처럼 근대는.인간다움'을 창조하겠다는 계몽의 신념이 인간을.자본의 노예'나.피가 흐르는 물질'로 만든 시대인지도 모른다.그는 예술만이(특히 영화) 이런 오류를 수정할 수 있다고 했고,따라서예술작품을 만드는 전체과정으로부터 자신이 조금도 소외되지 않기를 갈망했다.
일기는 과거의 흔적이자 내일을 향한 다짐이다.모든 사람이 예술가가 될 수는 없지만 누구나 일기를 써서 자기 자신과 가족,나아가 후손들에게 성실하고 진지한 삶을 증언할 수는 있다.오늘이라도 당장 일기장을 펼쳐놓고 소중한 나의 삶을 또박또박 문자로 옮기면 어떨까.그리고 누군가의 노*랫말처럼 10년쯤 지나 그일기를 꺼내 읽는다면? 자 모두들! 일기를 씁시다.
김 탁 환 (소설가겸 문학평론가)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