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장엽 북한 노동당비서 망명 진짜 동기 무엇일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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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황장엽(黃長燁)노동당비서의 갑작스런 망명사태는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그는 북한 최고의 사상이론가로서 김일성(金日成)주체사상의 이론체계를 정립한 장본인이다.그런 그가 망명하지 않을 수 없었다면 동기는 매우 심각한 것이라고 짐작할수 있다.북한권력의 속성상 黃비서 정도의 비중이라면 김정일(金正日)에 대 한 도전이나권력내부의 심각한 상황이 아닌데 망명할 것으로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통상적으로 거물급인사의 망명동기는 권력 내부사정과 개인사정 양갈래에서 파악된다.개인사정은 상대적으로 약한 부분이다.개인사정이라 해도 권력상황과 동떨어진 것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권력내부와 관련,두가지 설명이 가능하다.심각한 권력투쟁과 노선갈등의 서막이 아니냐는 진단이 그 하나다.다른 것으론 노선갈등이 이미 진행됐고 마무리단계에서 黃비서의 패배가 분명해져 망명의 길을 택한 것으로 보는 경우다.
북한의 최근 권력동향을 추적해 보면 새로운 권력투쟁 소용돌이의 가능성은 적다.김정일이 당총비서나 국가주석직에 취임하지 않고 있다 해도 그에 대한 도전세력의 움직임이 포착되지 않고 있다. 따라서 전자의 가능성은 상대적으로 적다.그렇다고 북한 권력상황에 문제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수렁에서 헤어날줄 모르는 경제난의 해법을 둘러싸고 노선과 정책의 이견이 심각하고 당내분쟁의 여지가 있는 것이다.
특히 黃비서는 당국제비서여서 바깥 공기를 잘알고 있었고 최근개혁적 사고를 보였다는 정보가 있던 터였다.黃비서와 그를 중심으로 한 그룹이 현정책으로는 회생불능이라고 판단해 개혁정책을 주장했을 가능성이 크다.이것이 당중심부에서 받아 들여지지 않으면서 당내의 단결을 해치는 종파분자로 내몰렸을 가능성이 있다.
노동당의 이론지인.근로자'에 작년 중반께 황장엽 비서를 겨냥한 논설이 실렸다는 얘기가 있다.
한 소식통은.근로자'의 논설은 주체사상이 마르크스-레닌주의를북한의 상황에 창조적으로 적용,발전시켰다는 견해를 전면 부인하고 독창적인 사상체계라고 주장했다고 전한다.
이 논설은 과거에 황장엽 비서를 비롯,주체사상 체계화에 관계한 이론가 그룹을 전면 비판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이다.이것은 黃비서 뿐만 아니라 주체사상을.과학적 사상체계'의 일환으로 이해하려는 지식계 전반에 대한 질타였다고 할 수 있다. 지식계의 생각처럼 주체사상이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전통을 이어가는 사상이라고 한다면,중국식 개혁(시장경제)의 적극적 수용이 논리적으로 가능해진다.중국의 지식층과 교류를 갖고 있는 북한의 지식층 인사들이 실제로 이같은 생각을 갖고 있 는 것으로알려지고 있다.黃비서가 이런 지식층의 거두로 비난의 표적이 됐을 가능성이 크다.
최근 북한의 사상이론적 상황은 김일성시대를 떠받들어 온 黃비서등의 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김정일의 사상체계를 떠받치는 신진 이데올로그들의 손에 놓여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은 80년대 중반이래.수령-당-대중의 사회정치적 생명체론'을 본격적으로 내걸고 주체사상의 체질을 변화시키고 노동당의 선전선동부.주체과학부 등에 포진해 지식층의 동요를 막고 통제해왔다.이들은 완고한 혁명1세대의 후원을 받고 있 으며 김정일의핵심적 지지세력인 군부지도자들과 강력히 결합되어 현체제를 이끌고 있는 것으로 관측된다.
黃비서는 이런 분위기에 더이상 견딜 수 없어 망명을 계획한 것으로 보인다.
어쩌면 신변의 위협까지 느끼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 분위기는 그가 사상이론이 아닌 국제비서로 임명되면서부터 이미 잉태된 것일 수도 있다.사상이론계의 대부인 그를 김정일의측근 김용순(金容淳.대남비서)이 버티고 있는 국제분야로 내몬 것은 그의 역할을 제한하려는 의도가 반영된 것인 지도 모른다.
黃비서의 망명으로 개혁적 사고를 지닌 지식인들의 입지는 더욱어려워질 것으로 예상되며,권력서클에서 김정일의 현체제에 대한 회의분자들이 추방될 가능성도 있다.
[도쿄=유영구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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