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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영호씨 남극 도보횡단 실패記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6면

슈퍼알피니스트 허영호(43)가 최근 남극도보횡단에 실패했다.허영호원정대가 남극점에도 못미쳤을 때 뵈르게 오우슬란(노르웨이)은 극점을 두배 이상 빨리 통과해 세계최초의 남극 단독도보횡단기록을 세웠다.그는 왜 실패했는가.허영호의 원정 시대는 한계에 달한 것인가.허영호의 실패담을 들어본다. [편집자註] 나는 또다시 살아 돌아왔다.그러나 숙원이던 남극횡단은 미완성으로 남았다. 남극대륙 도보횡단 7천리(2천8백㎞)를 목표로 남극 북서쪽 끝인 버크너섬(남위 78도20분)에서 동토에 첫발을 내디딘 것이 지난해 11월15일.남극점을 통과해 2월말 남동쪽 끝인 맥머드기지(남위 78도)에 도착할 예정으로 1백일 장정을 시작했으나 출발 68일만인 1월21일 남극점 도달을 끝으로 원정을 포기해야 했다. 남극점을 걸어서 밟은 것은 지난 93년에 이어 두번째다.그러나 이번 원정은 분명 실패였다.도보횡단을 목표로 했다가 중간에서 비행기로 되돌아왔다. 원정을 중도포기한 원인은 두가지다. 첫째,일부 대원(총 6명)의 체력이 중간에 눈에 띄게 떨어졌다.무보급을 목표로 1인당 1백60㎏씩의 짐을 썰매로 끌어야하는 이번 원정에서 체력은 알파요,오메가였다. 그러나 출발점에서 7백여㎞ 떨어진 남위 87도지점에서부터 대원 2명이 거의 기다시피했다.동상도 부상도 아닌 순전한 체력 탓이었다.원정을 포기하자니 들인 공이 아깝고 성공시키자니 갈 길이 요원했다.애초 계산대로라면 하루 20~30㎞ 를 운행해야하는데 대원들끼리 보조를 맞추다보니 거북이 걸음으로 하루 목표량의 반도 못가 주저앉기 일쑤였다. 결국 출발 53일째인 1월6일 남극까지만 가기로 목표를 수정했다.기어서라도 남극까진 가야했다.원정의 성패와 상관없이 최선을 다해야 했기 때문이다. 둘째,극지원정에서는 도보가 최고라는 지금까지의 경험과 원칙론만을 고수했다는 점도 무시할 수 없는 실패요인이다.지난 89년첫 북극원정을 시작한 이래 나는 7차례(북극3,자북극2,남극2회)의 극지원정을 모두 도보로 해냈다.도보원정을 위한 각종 의류와 신발등 장비도 내가 고안해 주문제작한 것이었다. 그러나 나의.발명품'은 오우슬란(33.노르웨이)의.비밀병기'에 미치지 못했다.우리와 같은 날,같은 장소를 출발한 오우슬란은 패러글라이더처럼 생긴 대형 연을 이용해 뒷바람을 안은 채 쏜살같이 설원을 미끄러져갔다.우리 원정대가 무거운 썰매를 매달고 낑낑대는 사이에 오우슬란은 풍력을 이용해 하루 최고 2백㎞이상을 주파하며 64일만에 혼자서 횡단을 성공시켰다. 솔직히 말해 나는 아직까지도 대형연을 이용한 원정이.도전의 질'에 있어 최상인지에 대해 스스로를 납득시키지 못한다.그러나원정은 결과가 말한다.영하 30도의 추위와 초속 20의 강풍을이기며 드넓은 남극대륙을 홀로 건넌 오우슬란의 용기에 경의를 표한다. 나는 다행히 실패에 익숙하다.지난 20년간 수십차례에걸친 도전중 30%는 실패였다.에베레스트(8,848)는 세번 올라 두번 등정했고 북극횡단(중앙일보 원정대)은 세번째만에 성공시켰다.따지고 보면 아문센이건 스코트건 지구상의 모든 모험가들에게 실패한 원정이란 결국 없다..미완의 원정'이 있을 뿐이다.아직 완성시키지 못한 남극횡단을 위해 나는 또다시 갈 것이다.이 다음엔 남이 가지 못한 더욱 긴 코스를 택해 연에 끌려가건 두 발로 걸어가건 반드시 갈 것이다. 이번 원정의 성과라면 극점에서 에드먼드 힐러리경을 다시 만난것이다.세계최초로 에베레스트를 등정(1953년)한 힐러리(78.뉴질랜드)경은 우리가 극점에 있던 1월23일 오우슬란과 함께비행기로 날아왔다. 힐러리경과 나는 2년3개월만에 포옹했다.이 노선배는 지난 94년10월 남극최고봉인 빈슨 매시프(5,140)원정당시 내가 선물했던 파일 재킷을 입고 있었다. 오우슬란이 횡단에 성공했다는 것도 이때 비로소 알았다.끝으로극한상황에서도 묵묵히 따라준 이근배.김승환.박쾌돈.이상호.최기순대원께 감사드린다.대원들의 몸무게가 출발초보다 7~10㎏씩 줄어들 만큼 고달픈 원정이었다. <허영호><사진설명> 지난달 23일 남극점에서 만난 에드먼드 힐러리경과뵈르게 오우슬란.이들은 허영호의 남극점 도달에 맞춰 맥머드기지에서부터 비행기로 날아왔다.힐러리경과는 2년3개월만에 다시 만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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