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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시콜콜 미국문화<5>말 한마디 없이 25년째 자리 지킨 女진행자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90호 07면

TV 채널이 KBS와 MBC밖에 없었던 20여 년 전 AFKN(주한미군방송·현재의 AFN Korea)은 단출한 편성표의 한편을 채워 주던 꽤나 비중 있는 오락거리였다. 비록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그림을 보는 것만으로도 재미가 쏠쏠했다.

당시 즐겨 보던 프로그램 중 하나가 ‘휠 오브 포춘(Wheel of Fortune)’이다. 액수가 적힌 커다란 바퀴를 돌려 상금을 정한 뒤 알파벳을 하나씩 불러 전체 단어나 문장을 맞히는 게임쇼다.

어린 시절을 함께한 이 프로그램이 올해로 25주년을 맞이했다. ‘휠 오브 포춘’은 지금까지 54개국에 프로그램 포맷이 수출돼 기네스북에 오를 정도로 인기 있는 게임쇼다. 시청자가 매주 1억 명에 달한다고 한다.

이 프로그램이 더더욱 오랜 친구처럼 느껴지는 것은 25년 동안 진행자가 한번도 바뀌지 않았기 때문이다. 팻 세이잭과 배너 화이트가 그 주인공. 프로그램 시작 당시 각각 30대와 20대였던 이들은 이제 중년의 노신사와 아주머니가 돼 있다.

한 가지 궁금한 것은 여성 진행자의 장수 비결이다. 그녀가 하는 일이라곤 야한 드레스를 입고 나와 대사도 한마디 없이 가려져 있던 알파벳을 출연자가 불러 주는 대로 뒤집는 것뿐이다. 진행자라기보다 진행보조에 가깝다.

그러나 그녀의 직업의식은 나름 투철하다. 1957년생이지만 20대도 울고 갈 ‘착한’ 몸매를 여전히 유지하고 있다. 게다가 자긍심 또한 엄청나 93년 삼성전자 미국 현지법인이 제품 광고에 그녀의 모습을 패러디해 내보내자 초상권 침해로 소송을 걸기도 했다.

올해로 25주년을 맞은 KBS ‘가족오락관’의 경우 여성 진행자가 스무 번이나 교체됐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글자판을 뒤집는 일도 하나의 전문성(?)으로 인정해 25년이나 기회를 준 미국 방송 관계자들의 뚝심이 새삼 대단해 보인다.

어떻게 보면 ‘예쁘게 생긴 덕에 세상살이 참 쉬워진 여성 캐릭터 베스트 5’에 들어갈 것만 같은 그녀지만 뭐든지 16년간 수련하면 ‘달인’이 되는 세상이니 같은 일을 25년간 해온 그녀의 성실성 하나만큼은 인정해 줘야 하지 않을까.


일간지 문화부 기자를 거쳐 샌프란시스코에서 유학하고 있는 김수경씨가 미국 대중문화에 대한 궁금증을 격주로 시시콜콜 전해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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