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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로보고세로읽기>鄕愁.복고 그리고 경제력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4면

코미디 프로그램에서는.추억의 책가방'을 통해 교복에 묻어 있는학창시절의 사연을 시청자에게 돌려보내고,.사랑의 징검다리'에서는 헤어진 사람,그래서 만나면 냉동돼 있던 과거의 일들이 오롯이 살아나는.그리운 이'를 찾아내 출연자에게 돌려 보낸다.
“뜨거워서 호호,맛이 좋아 호호”의 빵이나“형님 먼저,아우 먼저”의 라면은 십수년전 포맷 그대로의 광고를 내보내면서 과거를 현재에 바로 심어 놓는다.뿐만 아니라 대중음악은 이른바 리메이크라는 방식으로 왕년의.히트 곡'을 다시 유행■ 키고,서울인사동에서는 이전 같으면 뒤 닦는 종이로나 썼던 누런 갱지의 60년대.국민학교'교과서를 비싼 값에 팔고 있다.
이처럼 과거 혹은 이제는 사라진,그래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시절의 풍정(風情)이 우리의 일상 곳곳에 머리를 내밀면서 이상하게 다시 돌아온다.그리해서 그 무수한.과거 회귀'는 특정한 효과와 경향을 만들어 내고 있다.복고화 혹은 향 수 불러일으키기,그리고 마케팅 포인트로서의 향수이미지 등이 그것일 터다.
향수는 인간의 급소다.어떤 강자도 이 향수를 당해낼 재간이 없다.역발산기개세(力拔山氣蓋世)의 초패왕이 넘어간 것도 사면초가(四面楚歌)라는 창에 이 급소를 찔려서다.우리의 경우 이 급소치기,즉 향수나 과거에의 그리움을 불러일으키고자 했던 것은 최근 일이 아니다.
80년초.중반.그때를 아십니까'가 있었다.그러나 그것은 실패였다.가난에 찌든 모습을 보여주면서 그때에 비하면 지금은 정말좋은 세상이니 들썩거리지 말고 가만 있으라는 노골적인 정치용 프로그램이었기 때문이다.하지만 이제는 다르다.정 치용이 아니라무엇보다 자연스러운 상품 이미지에서 또는 대중의 자발적인 회고경향에서 뒷배를 얻어 오기에 그렇다.
***향 수나 복고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자격이있어야 한다 그 자격은 과거의 기억에 대한 물질적.심리적.미학적 관리의 자유로움이 가능할때 주어진다.지금도 여전히 과거와 같이 가난과 고생에 시달린다면 그 과거는 절대로 달콤한 향 수로 번역되지 않는다.생각하기도 싫은 고통의 시간일 뿐.그러나 지금의 자리가 괜찮은 물질적 부를 깔고 있다면 과거의 고생은 현재의 풍요함을 더욱 빛나게 해주는 알리바이자 자랑스러운 역사의 한 장으로 배치된다.동시에 소비능력이 있어야 자격이 주어진다.현대에서 많은 경우 향수는 찾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사람을찾아온다.상품을 통해서다.찾아오는 것을 구매할 수 있어야 과거에의 그리움은 가동된다.70년대 이후의 미국,그리고 90년대의우리 사회에서 이른바.향수산업' 이 괄목할 만한 신장을 하고 있는 것은 그런 자격이 있음을 일러주는 징표다.
없던 사람이 좀 있게 되면 가장 먼저 족보부터 만든다.족보는과거의 체계화다.이제 우리사회에서는 보릿고개도,가루우유나 밀가루 같은 미국 원조물의 역사도 머뭇거리지 않고 과거의 체계화에집어 넣는다.또 족보 만들기도 어렵지 않다.향 수상품의 소비는당연히 향수이미지의 집합이 되고 그 집합이 자연스레 족보를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미국에서의 향수산업이 한창일 때 한 선지식(善知識)은 이렇게 말했다.“소비를 통한 과거이미지에의 복귀,그것은 역사를 이야기하되 역사를 지워버리는 일에 가까이 있다.
우리의 경우는?” 이 성 욱 (문화평론가) ◇알림:이번주부터는김용호씨 대신 이성욱씨가.가로보고 세로읽기'의 필진으로 참여합니다. ▶필자 약력:60년생.한신대 국문과 석사.문학.문화평론가.문화과학 편집위원.민예총 문예아카데미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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