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국제 신뢰에 먹칠만 한 외환은행 헐값 시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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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2003년 외환은행이 미국계 사모펀드 론스타에 헐값에 넘겨졌다고 볼 수 없다는 법원 판결이 나왔다. 이에 따라 론스타와 결탁해 외환은행을 헐값에 매각했다며 기소된 변양호 전 재정경제부 금융정책국장과 이강원 전 외환은행장, 이달용 전 부행장에 대한 배임 혐의에 대해 모두 무죄가 선고됐다. 론스타의 인수자격 시비가 불거진 지 4년, 헐값 매각에 대한 검찰 수사가 시작된 지 2년 만에 외환은행 매각에 아무 문제가 없었다는 결론이 난 것이다. 흡사 나라를 팔아먹은 죄인을 처단한다는 듯이 온 나라를 들쑤셔놓은 사법처리의 결과가 아무 문제가 없었다니 이 무슨 허망한 일이란 말인가. 그동안 무고하게 수사와 재판에 시달린 당사자들의 고초와 무모한 사법 처리로 땅에 떨어진 나라의 체면과 국제 신인도는 어쩔 것인가.

사실 이번 재판은 처음부터 해서는 안 되는 재판이었다. 한 시민단체가 제기한 헐값 매각 시비에 휘둘려 여야 국회의원과 감사원이 나서고 검찰 수사와 법정 공방에 이르는 과정 자체가 세계 13위 경제대국에서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어려울 때 할 수 없이 매각한 은행이 나중에 값이 오르자 헐값 매각이니 ‘먹튀’니 하는 ‘배 아픈 병’이 도졌고, 이것이 여론을 빙자한 이른바 ‘국민 정서법’의 도마에 올려졌다. 여기까지는 사정을 모르는 일반인의 국민 감정이라 치더라도 감사원과 검찰마저 근거없는 여론을 등에 업고 총대를 메고 나선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감사원은 헐값 매각의 증거도 없이 검찰 수사를 의뢰했고 검찰은 10개월의 수사에도 불구하고 불법행위의 증거를 찾아내지 못했다. 그렇다면 거기서 멈췄어야 했다. 아무리 배가 아프더라도 정책은 정책이고, 계약은 계약이다. 사적인 이득을 노린 명백한 불법행위가 아니라면 위기 상황에서 내린 정부 당국자의 정책적 결정을 법정으로 가져가선 안 되는 것이다.

외환은행 헐값 매각 재판으로 한국은 국제 사회로부터 ‘정부의 결정과 합법적인 계약을 여론에 따라 아무렇게나 뒤집을 수 있는 나라’라는 오명을 뒤집어썼다. 여기다가 정부는 사법 절차를 이유로 승인을 내주지 않는 바람에 외환은행 매각이 무산된 데 대해 거액의 소송을 당할 판이다.

이제 전 세계적인 금융위기의 태풍 속에 또 한 차례 대규모 구조조정의 회오리가 예고되고 있다. 만일 위기 대응을 위한 정책 결정을 소급해 사법 처리하는 일이 반복된다면 누구도 책임질 일을 떠안지 않을 것이다. 국민 정서법과 여론재판에 휘둘려서는 결코 위기를 넘길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