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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장처럼 마음에 절여진 ‘보쌈의 추억’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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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호 14면

따끈한 수육에 감칠맛 나는 김치가 어우러진 돼지고기 보쌈

“요즘 배추 몇백 포기 김장을 담근다고 하면 외계인 보듯 하더라고요. 부모님께서 아파트로 이사 가시기 전만 해도 김장독을 씻고 마당에 독을 묻는 일은 제가 도맡아 했거든요. 밤늦게까지 배추 다듬고 절이고, 다음 날까지 이어지는 김장이지만 힘든 줄 몰랐어요.”

김태경·정한진의 음식수다

“너는 그때부터 요리사가 될 운명이었나 보다. 김장을 ‘반(半)식량’이라고 불렀듯이 겨우내 식량으로 김장을 담그는 것이 집안일 중에 큰 행사였지. 요즘에야 김치를 사 먹는 집이 많지만 예전에는 김치와 장을 얻어먹는 것을 부끄러워했거든.”
“나라 밖에 있으면 제일 생각나는 게 김치라잖아요. 저도 중국 시장에 가서 배추 사오고 우리 젓갈 대신 베트남 액젓으로 꼬박꼬박 김치를 담가 먹었거든요.”

“사실 김장이라는 게 정말 쉽지 않은 일이야. 질 좋은 태양초를 사 마당에 널어 말리고 하나하나 잘 닦은 다음 꼭지를 떼고 씨를 뺀 후 방앗간에서 빻아 오고. 맛있는 새우 육젓도 미리 사 놓아야 하고. 그러고 보니 육쪽마늘도 있어야 하네. 김장철이 되면 속이 꽉 차 달고 고소한 맛이 나는 배추 골라야지, 중간 크기의 단단하고 매끄러운 조선무 골라야지. 무엇보다 겨우내 먹어야 할 김치 맛을 결정하는 좋은 천일염을 속지 않고 사는 게 중요하고. 정말 일도 많고 신경도 쓰이는 게 김장이야.”

김치를 언제부터 먹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농경을 시작해 곡물을 주식으로 삼은 후부터 담아 먹기 시작했다고 한다. 중국 『시경』에 ‘외를 깎아 저(菹)를 담자’는 구절이 있는데, 이 절인 채소가 김치류에 속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소금과 그 밖의 양념에 채소를 재워 두면 수분이 빠져나오면서 채소가 가라앉는 상태를 보고 ‘침채(沈菜)’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 이 ‘침채’가 ‘팀채’가 되고, 이것이 ‘딤채’로 변하고 구개음화해서 ‘김채’, 다시 ‘김치’가 되었다.

“임진왜란 때 고추가 유입되기 전에는 장아찌형이나 신건지 짠지형, 그 다음으로는 나박김치 동치미형, 섞박지 소박형의 김치를 많이 담갔다고 하지. 재료도 무·외·가지가 많았다고 하고.”

“양념으로는 산초·마늘·생강 등이 많이 쓰였죠. 아직까지 구례 지역에서는 산초김치를 담근다고 해요. 고추가 김치 양념으로 자리 잡기 시작하면서 이전의 담백한 김치가 여러 양념이 들어가는 김치로 바뀌게 됐죠. 특히 젓갈이 다양하게 쓰이는 게 큰 변화예요.”

지금 흔히 먹는 통배추김치는 속이 찬 배추를 생산하기 시작한 1800년대 말부터 담근 것으로 보인다. 일제강점기에는 중국인이 서대문 밖 아현동과 신촌 일대에서 속이 꽉 찬 배추를 재배해 팔았는데, 이를 중국인이 키워 판다고 해서 ‘호배추’라 불렀다고 한다.

“그런데 김치 종류는 몇 가지나 될까?”
“장아찌형 김치까지 포함한다면 200여 가지가 넘을 것 같은데요. 김장 때 흔히 담가 먹는 통배추김치·동치미·총각김치·갓김치 외에도 개성의 보쌈김치, 동태·가자미·대구를 넣는 황해도의 배추김치나 무김치, 제주도의 전복김치. 아마도 평생을 살면서 먹어 보지 못한 김치들이 더 많겠죠.”

“동치미 하니까 시원한 동치미 국물에 말아 먹는 냉면이 생각나네. 동짓날 잘 익어 톡 쏘는 동치미에 동지 팥죽 먹는 재미도 그만이었는데.”
“저는 김장 담그는 날 절인 배춧속에 막 삶아 김이 모락모락 나는 돼지 수육을 얹고 그 위에 김치소랑 싱싱한 굴을 놓아 싸 먹는 보쌈이 제일 생각나는데요. 아마도 그 맛 때문에 제가 김장 일을 열심히 도왔던 것 같아요.”

“갑자기 출출하다. 자, 이야기는 보쌈 집에서 마저 하자고.”
온 식구가 모여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면서 김장을 담그고, 늦은 저녁 갓 담은 배추 겉절이를 쭉쭉 찢어 따뜻한 밥에 얹어 한입 가득 넣고 흐뭇해하던 풍경이 그립다. 갓 삶아 따끈한 수육을 먹이려고 뜨거운 줄 모르고 손을 놀리던 어머니의 손길이 추워진 날씨 따라 더욱 그리워진다.
사진 중앙포토


맛있는 것 먹기를 낙으로 삼는 대학 미학과 선후배 김태경(이론과실천 대표)ㆍ정한진(창원전문대 식품조리과 교수)씨가 미학(美學) 대신 미식(美食)을 탐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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