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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의눈>노블레스 오블리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대우의 톰슨 멀티미디어사 인수 백지화를 설명하기 위해 내한했던 장 클로드 페이 프랑스 대통령특사는 그야말로.혹떼려다 혹붙인 꼴'이 됐다.
사실상의 진사(陳謝)사절이었던 그에게 김영삼(金泳三)대통령은외교상 전례가 드문 경고성 어휘까지 써가며 강한 불만을 표시했다.나아가 93년 미테랑 당시 프랑스대통령이 방한때 약속했던 외규장각 도서 반환약속이 지켜지지 않고 있는 점 도 강한 어조로 비난했다.해명에 급급했던 프랑스특사의 표정은 안 보고도 짐작이 간다.
대우의 톰슨 멀티미디어사 인수가 어떤 경로로 중단됐는지를 잘알고 있고,그래서 프랑스측의 인종차별적 처사에 분통을 터뜨리고있던 많은 국민들은 아마도 대통령이 이처럼.호통'쳐준데 대해 속이 시원했을 것이다.
“하하,지난번 일본사람들의 .버르장머리'없음을 일갈했던 대통령이 이번엔 프랑스사람들 코를 납작하게 했어.”-이런 얘기들을나누며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느꼈을 것이다.
그래서 어떻게 됐나.달라진 것이 없다.프랑스특사는 이한(離韓)회견에서“대우가 많은 경쟁업체중 하나로 다시 참여하길 희망한다”“교환될 고문서 목록만 합의되면 외규장각 고문서반환문제가 곧 해결될 것”이라는 원론적이며 외교적인 언사만 되풀이했다.
물론 인종차별의 반(反)문명성을 나름대로 경험을 통해 알고 있는 필자는 프랑스측의 톰슨 멀티미디어사 관련처사에 대해 대통령과 견해를 같이 한다.또 외규장각 도서반환문제에 대해서도“차라리 돌려준다고 약속이나 하지 말지…”라는 대통령 의 심정에 동감한다.기분 같아선“TGV 기술도입을 재검토할 수 있다”는 엄포가 없었던게 아쉽다는 느낌까지 든다.
그러나 역지사지(易地思之)해볼 부분이 있다.입장을 바꿔 외규장각 도서반환문제에 대한 프랑스측의 태도만은 진정 우리가 본받아야 할 대목이 아닐까.문화재,나아가 문화 일반에 대한 인식의수준 말이다.
프랑스에서 문화부가 수석부처란 얘기는 이제 진부하다.외국인 문제와 주택난이 아무리 심각해도 예술가라면 외국인에게도 거의 공짜나 다름없는 가격에 대형 임대주택을 평생 제공하는 나라가 프랑스다.대통령이 약속해도 담당자는 울면서 반환을 못하겠다고 버티는 나라가 바로 프랑스다.
우리는 어떤가.잘했다는 사람도 많지만 어쨌든“역사를 바로 세우자”는 대통령 말씀 한마디로 새 박물관이 건립되기도 전에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쓰던 총독부 건물부터 부숴야 직성이 풀리는 나라다.문화재의 안위(安危)는 그 다음이다.경부고속 철도 노선문제로 시끄러운 마당에 적석총 등 1백6개의 문화재가 산재해 있는 경주의 또 다른 지역에 감히 경마장을 건설하겠다는 발상을 하는 나라가 바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한 우리나라다. 어디 문화쪽 뿐이겠는가.누가 봐도 자연스럽지 못한 노동법의 새벽 날치기 통과와 이후 사태해결에 아무런 도움도 못주는 정치권,이 문제로 온 나라가 뒤끓어도.우리의 목표는 달성됐다'는 식으로 팔짱만 끼고 있는 경제계,대화와 타협보다. 본때 보이기'에 주력하는 듯한 노동계….선진국을 상징하는 OECD의 보편적 수준과는 한참 다른 우리의 자화상이다.
물론 우리의 OECD 가입은 수준이 돼서라기보다 정치적 고려가 우선한 선택이었다.그렇지만 이젠 OECD 수준에 맞는 사고와 행동을 할 때가 됐다.우선은 어렵겠지만 그게 장기적으로 득이 된다.
프랑스 사람들이 오래전부터 한국을 개도국이 아니라 일본 같은OECD국가로 알고 있었으면 톰슨사태는 없었을지 모른다.또 같은 제품이라도 개도국이 아닌 OECD 회원국 한국의 제품은 그만큼의 경쟁력을 덤으로 얻는다.
매사에 공짜가 없다..노블레스 오블리지'(noblesse oblige)-고귀한 신분엔 그만한 의무가 따르는 법이다.
(문화부 차장) 유재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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