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중앙 시평

용기 내도록 버팀목을 깔자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1면

같은 시각 미국 증시는 다우지수가 5% 이상 폭락하며 버팀목이 돼줄 걸로 기대했던 8000선 아래로 맥없이 주저앉았다. 10월 소비자물가가 1% 하락하며 그동안 우려해왔던 디플레이션이 현실화할 가능성을 분명히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멀리는 1930년대 대공황이, 가깝게는 1990년대 이후 일본의 이른바 ‘잃어버린 10년’이 떠올려지는 상황에 시장은 민감하게 반응했다. 그리고 진눈깨비 내리던 어제, 서울 증시도 1000선 아래로 다시 곤두박질쳤고, 미 달러 환율은 한때 1500원선을 뚫고 올라갔다. 갑자기 찾아온 사흘 겨울 날씨 뒤, 오늘부터 기온은 다시 오른다지만 이내 겨울은 올 것이고, 불황의 초입에 들어선 경기는 더욱 싸늘해질 모양새다.

11년 전 바로 오늘 한국 정부는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한다고 발표했다. 그 며칠 후 나는 경제부장을 맡게 됐고 그 후 2년여 외환위기의 현장과 마주했다. 지금도 기억한다. 수많은 금융기관과 기업들이 쓸려나가고, 그 와중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고통받았는가를. 그리고 떠올린다. 그런 혹독한 시절을 다시 겪지야 않겠지 하던 믿음을. 하지만 추운 겨울은 코앞에 와 있고, 이제 그 겨울을 견뎌낼 방법을 찾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 다시 몰렸다.

물론 이번의 위기는 11년 전과 분명히 다르다. 나라의 외환보유액도, 금융기관의 위험관리도, 부채비율이나 생산성 등 기업의 체력도 그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나아진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글로벌 위기상황에서 그러한 체질 개선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는 현실, 예나 지금이나 고통의 최종 담당자는 가계와 개인이라는 현실이 우리를 무겁게 눌러오고 있다.

이 위기상황이 얼마만 한 깊이로 얼마만큼 이어질지 누구도 알지 못한다. 1년이다 5년이다 무성한 말이 나오지만 모두 추측일 뿐이다. 결국은 버틸 만큼 버텨 이겨내는 수밖에 없다. 그러기 위해서는 국민들, 특히 한계선상에 내몰릴 국민들에게 버틸 힘을 주어야 한다. 어렵던 시절 많은 이들이 일자리가 없음을 괴로워했고, 아이들의 교육이나 건강을 제대로 챙겨줄 수 없음을 힘들어했다. 어려운 시절 버틸 힘의 근본은 일자리이고 교육이고 의료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이 고용이다. 고용은 생계뿐 아니라 자신의 존엄성 유지, 가족 유대의 원천으로서도 중요한 기능을 한다. 내년 성장률은 높이 잡아도 3%가 어렵다. 성장률 1% 하락에 고용은 5만∼6만 명 순감한다. 취업전선에 새로 나올 인력까지 감안하면 구조조정의 강도를 짐작할 수 있다. 따라서 어떻게 하면 고용을 늘리느냐, 어떻게 하면 고용을 유지하느냐, 어떻게 하면 어쩔 수 없이 탈락한 사람들을 고용보험이나 재교육·재취업·공공근로 등의 시스템 속에 감싸 안을 것이냐가 최우선 과제가 되어야 한다. 수도권 규제완화는 고용창출의 길로, 파견근로자에 대한 계약기간을 2년에서 3∼4년으로 연장하는 것은 고용유지의 방편으로 보는 눈이 필요하다. 이상을 펼치기에는 당장 닥쳐올 안팎의 현실이 혹독하다.

경제위기는 자칫 자라나는 세대로부터 교육받을 수 있는 권리를 박탈함으로써 지우기 힘든 상처를 남길 수도 있다. 보육·유치원 시설의 확충에서부터 초·중·고교의 급식문제, 대학생 학자금 대출의 확대에 이르기까지, 자라나는 세대의 미래가 현재의 어려움에 의해 꺾이는 일이 없도록 하는 국가적·사회적 노력이 절실하다. 어려운 시기 제일 힘든 것 중 또 하나가 아플 때다. 다행히 우리의 건강보험체계가 다른 나라에 비해 상당히 잘 갖춰져 있다곤 하지만 보험료나 최소한의 자기부담조차 버거울 계층이 늘어날 것에 대비한 배려를 미리 해야 한다.

이희건 신한금융 창업자가 라응찬 회장에게 해주던 이야기를 50개로 요약했다는 ‘오십훈(五十訓)’이 최근 이코노미스트(11월 25일자)에 소개됐다. 거기에 이런 말이 있다. “재물을 잃는 것은 조금 잃는 것이고 신용을 잃는 것은 많이 잃는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잃는 것은 전부를 잃는 것이다.” 용기가 있으면 위기를 버텨낼 수 있다. 살아남아 희망을 보고야 말겠다는 용기다. 그 용기에 조금의 버팀목만 더해지면 그야말로 용기백배할 수 있는 게 인간이다. 그 버팀목을 정부는 깔아놓고, 사회도 함께 도와야 한다.

박태욱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