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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경기철 제값 주고 사면 손해-정찰제 파괴바람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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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아무도 정찰제를 믿지 않아요.으레 20~30%정도는 깎아줘야 살 생각을 하니 별 도리가 없어요.” 파리에서 구두소매상을하는 카롤 불라(42.여)는 손님들의 가격흥정에 신물이 난 표정이었다.
얼마전까지 표시가격에 군소리를 않던 손님들이 예전과 달리 할인은 당연한듯 요구하고 거절당하면 발길을 돌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불경기가 지속되면서 서유럽에서 선진 상거래의 표본처럼 인식돼오던 가격 정찰제가 서서히 붕괴되고 있다.
이같은 현상은 의류를 필두로 귀금속.호텔숙박.전자제품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상품으로 확산되고 있으며 심지어 병원의 진료비까지 에누리의 대상이 되는등 가격흥정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최근 프랑스 생활조건관찰및 연구센터(CREDOC)의 조사에 따르면 남성(67%)이 여성(33%)보다 흥정에 관심이 컸으며이중 45~54세 사이로 월평균 2만4천~3만6천프랑(3백90만~5백80만원)정도의 중상류층이 흥정에 더 열 을 올리고 있었다. 자동차의 경우 72%가 흥정을 벌이며 주택(50%).가구(36%).건물수리(36%)도 한결같이 흥정대상인 것으로 조사됐다. 파리에 사는 가정주부 르시애(37)는“호텔의 아침식사,스키장의 리프트 티켓,타이어 4개중 하나는 무조건 공짜라고 생각해야 한다”고 못박고“요즘 제 가격을 다 주는 바보가 어디있느냐”고 반문했다.
영국에서도 흥정바람은 프랑스와 마찬가지다.
런던의 전자상가로 유명한 토튼함 코트에서 멀쩡히 붙어있는 정찰가격은 아예 무시해야 한다는게 현지 주민들의 조언이다.
상인들이 20% 할인된 가격을 제시하면 여기서 다시 30%는깎아야 적어도 바가지를 면했다고 봐야 한다는 것.
특히 카드 대신 세금추적이 어려운 현금을 지불할 때는 더 좋은 조건을 얻을 수 있다는 설명이다.
비교적 아직도 정찰제가 그런대로 유지되는 독일에서도 소규모 소매상점을 중심으로 정찰제의 불문율이 깨져가고 있다.
베를린의 쿠퓌어스텐담에 있는 기념품가게는 여러 상품을 많이 구입하면 할인혜택을 주고 있으며 고급 의상실이나 가구점등에서도현금지불 고객에게는.특혜'가 예외없이 보장되는 세태다.
상인들도 이 새로운 풍습에 차츰 적응하고 있다.
파리 시내 14구의 한 모피집은 아예 입구에.이성적인 제안은모두 수용 가능함'이라고 써붙여놓아 할인을 공공연히 암시하고 있다. 일부 상점은 또 재고정리.프로모션.창고방출등 다양한 용어를 동원해 가격을 부풀려놓은뒤 깎아주는 선심을 베푸는 악덕 상술도 등장하고 있다.
이같은 흥정이 싫거나 정찰제를 고수하는 백화점.대형 체인점의상품을 선호하는 소비자들은 충동구매를 자제하고 1년에 겨울과 여름 두번 열리는 세일을 적극 할용하고 있다.
프랑스 의류산업의 경우 연간 매출액의 절반 가량이 이 세일기간에 소화되고 있다는 통계는 서구 소비자들이 점점 더 알뜰해지는 경향을 방증하는 일례라고 할 수 있다.
프랑스의 시사주간 르 포앵은 “위기의식에서 유발된 흥정현상은상인들에 대한 소비자의 보복”이라며 “소비자는 흥정을 통해 무미건조하고 살균된 사회에 대해 저항하며 기성 제도에 대해 정신적 승리감을 누리고 있다”고 분석했다.
[파리=고대훈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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