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올림픽 30年·태권도 40年] 47. 히로시마 아시안게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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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허진량 중국 IOC 위원(左)은 히로시마아시안게임에 태권도가 정식종목으로 채택되는 데 큰 도움을 줬다.

태권도는 1986년 서울아시안게임에서 정식종목으로 선보였다. 하지만 주최국이기 때문에 정식종목이 가능했고, 참가국도 27개 국에 불과했다. 90년 베이징아시안게임에서는 당연히(?) 제외됐다. 아시안게임에서도 정식종목으로 채택되지 않는 수준으로 올림픽 정식종목을 노리는 것은 불가능이었다.

94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에서 태권도가 정식종목이 되는 건 올림픽을 향한 항로를 위해 반드시 필요했다. 대한올림픽위원회와 아시아태권도연맹이 숱한 노력을 했지만 모두 수포로 돌아갔다. 아시아연맹 이규석 사무총장이 찾아와 도와 달라고 호소했다. 호소하건 안 하건, 그것은 내 일이었고, 태권도의 운명이 걸린 일이었다.

중국에는 아직 태권도가 보급되지 않은 때였지만 중국의 허진량 IOC 위원과는 늘 태권도와 우슈의 연계성과 차이점 등을 논의하는 사이였고, 88년 서울올림픽 때 중국 참가 문제를 의논하다 친해졌다. 중국으로 가 협조를 요청했다. 허 위원은 지지를 확실히 약속했다.

바로 일본으로 갔다. 일본올림픽위원회(JOC) 후루하시 위원장과 스스미 요시아키 명예위원장을 만났다.

히로시마아시안게임 조직위원장이기도 한 후루하시는 98년 나가노 겨울올림픽 유치의 주역으로 내 도움을 많이 받았고, 스스미 명예위원장은 JOC 분리독립 축하회에서 내가 축사를 한 인연으로 잘 알았다. 만난 자리에서 그들은 대뜸 문건을 꺼냈다. 내가 온다고 해서 외무성과 문부성에 알아본 결과 ‘태권도는 아직 국제경기답지 못하다’는 부정적인 내용을 보고받은 것이다. 이때 일본은 이미 가라테 15체급을 정식종목으로 채택해놓고 있는 상태였다.

나는 “가라테를 절반으로 줄이고 태권도를 넣자. 필요하다면 경기 비용은 우리가 낼 용의가 있다”고 했다. JOC와 히로시마조직위가 바쁘게 움직였다. 밤에 세계탁구연맹 회장인 오기무라 이치로가 찾아왔다. “4체급이면 되겠냐”고 묻기에 “8체급은 돼야 한다. 대신 한국은 4체급에만 출전하겠다”고 대답했다.

제일 중요한 곳은 아시안게임을 주관하는 아시아올림픽위원회(OCA)였다. 때마침 아마드 OCA 회장이 서울에 왔다. 그는 86서울아시안게임 때 OCA 회장이었던 세이크 파히드(쿠웨이트 국왕의 동생으로 이라크전쟁 때 사망)의 아들이었다. 부친의 정을 못 잊는 그가 쿠웨이트에 아버지 박물관을 짓는다는 소식을 들었었다. 그를 국기원에 초청해 86아시안게임 때 아버지의 활약상을 담은 비디오테이프를 선물로 줬다. 그는 눈물을 흘리며 감사했다. 파히드에 대한 대부분의 기록은 전쟁 때 없어졌다고 했다.

이런 노력의 결실로 OCA 총회에서 태권도는 히로시마아시안게임 정식종목으로 채택됐다. 한국은 4체급에만 출전해 메달도 자연스럽게 배분됐다. 쿠웨이트와 대만이 금메달을 차지했고, 베트남은 역사상 첫 은메달을, 네팔도 역사상 첫 동메달을 태권도에서 땄다.

김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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