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한국과 오바마 정부를 동시에 노리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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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북한이 남북 육로 통행을 12월 1일부터 제한·차단하고, 핵시료 채취를 거부하며, 남북 당국 간 연락 창구를 폐쇄하겠다고 위협했다. 한·미에 동시다발적 압박을 가함으로써 정치·경제적 이익을 얻겠다는 북한 특유의 벼랑 끝 전술이다. 그러나 하나같이 무모한 이런 압박은 북한에 백해무익한 부메랑으로 돌아갈 것임을 경고한다.

북한은 대남(對南) 압박의 구실로 ‘6·15와 10·4 선언에 대한 남측 정부의 구태의연한 입장’을 들었다. 두 선언을 포함한 기존 남북 합의의 정신을 존중하고 두 선언의 이행을 위한 협의를 갖자는 게 남측 정부의 기본 입장이다. 대북(對北) 일방적 지원의 중지를 공약했던 정권으로선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선(線)인 것이다. 반면 북한은 두 선언의 이행을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억지에 불과하다. 10·4 합의 중 조선협력단지 건설은 현장조사 한번 없이 합의됐다. 특히 철도역도 없고 실어나를 물자도 빈약한데 운행부터 시작한 화물열차 개통은 코미디 수준이었다. 개성∼신의주 철도 개·보수 등에는 천문학적 비용이 소용되는데 어떻게 이행을 담보할 수 있겠는가.

사정이 이렇게 명백한데도 북한이 이행을 강요하는 것은 남측 정부를 길들이겠다는 것이다. 김대중·노무현 정권 때처럼 자신들이 상전 노릇하면서 지원도 받아내겠다는 의도다. 그러나 이는 오산이다. 북한이 심각한 식량난을 겪고 있다는 것이 최근 미국 신문의 현장보도로 확인됐다. 최소한의 양식이 있는 정부라면 대책을 세우느라 발버둥칠 것이다. 그런데 남측의 식량 지원을 거부한 데 이어 주민 10여 만명의 생계가 걸린 개성공단 사업마저 중단시키겠다니 그 희생자는 누구인가. 북한 집권층이 아니라 힘없는 주민들이다. 북한 체제를 가급적 긍정적 차원에서 보려는 남측 국민들도 반감을 갖게 된다는 점에 유념하라.

북한의 핵시료 채취 거부는 미국 오바마 정부와 직접 담판하면서 이를 매개로 대가를 얻어내겠다는 의도다. 그러나 오바마 정부는 북한과 대화는 하되 완벽한 핵검증만은 관철하겠다는 입장이다. 핵시료 채취없이 그냥 넘어갈 수 있으리라 보는가. 설사 어떤 식의 타협이 나온다 해도 이렇게 시간을 질질 끌다 보면 북한이 절실하게 원하는 국제 자본의 북한 유입은 흐지부지될 수밖에 없다. 스스로 잘 판단해 보라.

정부도 상황을 불필요하게 악화시킬 필요는 없다고 본다. 기다리는 것도 방법의 하나다. 통신선 정상화를 위한 자재 제공을 어제 북측에 제의한 것은 늑장 대응이었다. 대북 전단 살포 중지에도 보다 적극성을 보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