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호세상보기>평양 외교부의 사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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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12월 중순에 접어들면서 평양 외교부의 분위기는 긴장의 연속이었다.뉴욕에 급파된 미주국장 이형철로부터 미국의 자세가 달라졌다는 급전(急電)이 들어오고 있었다.미국은 잠수함 침투사건의사과를 요구하는 남조선과 이를 거부하는 평양 사 이에서 .중재자'로서 기능하다가 요즘은 남조선의.대리인'노릇을 하고 있다는게 그의 보고였다.
내년(97년)은 위대한 수령의 3년상을 끝내고,김정일 동지의주석직 승계가 예정된 해다.이같은 대사를 무사히 치르려면 식량난 곧.먹는 문제'의 해결이 급선무다.따라서 한국과 미국의 요구를.빨리 그러나 대충'들어주고 그 대가로 식량 원조를 받는 것이 상책이라고 외교부는 판단했다.외교부는 그런 절박한 사정 아래서는 침투(浸透)라는 용어가 반드시 들어가야 한다는 상대편의 요구도 못 들어줄게 없다는 입장을 정했다.
대신,사과는 한국이 아닌 미국에 하는 형식을 관철하라는 지령이 이형철에게 내려갔다.그것은 잠수함 침투조가 동에서 서로 한반도를 횡단해 수도권 주변의 미군기지를 강습할 임무를 띠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이유를 달았다.그러나 이런 주장을 펴는 이형철에게 어디 아프냐는 질문이 던져지자 그 지령은 철회됐다.평양 외교부의 성명은 이런 배경 아래 탄생했다.
“조선 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하 북조선) 외교부 대변인은 위대한 지도자 김정일 동지의 위임에 의하여 다음과 같은 성명을 발표한다.
1996년 9월18일 북조선 해군 소속 잠수함 1정이 대한민국(이하 한국)강원도 강릉 해안에 침투했다.이 잠수함에는 승조원과 전투원.공작원등 모두 26명이 타고 있었다.침투조의 활동개시와 더불어 한국 군인과 무고한 민간인 16명이 희생됐다.막심한 인명피해를 초래한데 대해 북조선은 한국 국민과 정부에 대해 깊은 유감을 표시한다.” 그러나 이같은 사과성명이 뉴욕 접촉에서 일거에 거부되자 평양 외교부는 크게 당황했다.외교부는 간부회의를 열고 어떻게 하면 한국 요구를 최소한의 범위 안에서수용할 수 있을 것인가를 논의했다.우선 성명이 너무 짧다는 점,좀 더 솔직 한 표현이 있어야 하고,시인.사과는 했지만 관계자 처벌과 재발 방지에 대한 다짐이 없다는 점이 지적됐다.그래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보충하기로 했다.
“잠수함 침투사건을 북조선 매체가.훈련중 표류'라고 변명한 것은 억지다.남쪽에 천배 백배 보복하겠다고 말한 것은 적반하장(賊反荷杖)이다.이런 불미스런 일은 좌익 맹동분자들이 주도한 것이고,일부 아래 일꾼들의 실무적 착오도 있었다.북 조선은 유관분자를 모두 처벌할 것을 약속한다.
이 사건으로 한국 국민과 정부에 막대한 피해를 준데 대해 뒤늦게나마 사과하게 된 것을 다행으로 여긴다.북조선은 앞으로 일체의 무력도발 행위가 다시 일어나지 않을 것을 보장한다.이 성명문의 영문 번역에서 .보장할 것을 노력한다'고 표현돼도 그것이 우리의 다짐을 모호하게 할 이유가 없다.” 이 보충성명을 놓고 평양 외교부는 재발방지를 보장한다는 표현을 쓴 것이 한국을 크게 만족시킬 것이라고 자평(自評)했다..노력하겠다'는 말이 한국 사회에서 얼마나 평가절하되고 있는가를 알기 때문이다.
(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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