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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년 신춘중앙문예 단편소설 당선작 "향기와 칼날"1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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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2면

사향처럼 번지는 이 냄새와 고요.무명같은 가을 햇살 속에서 아버지는 술통을 씻고 있다.십수년간 그래왔듯이,통을 거꾸로 세워마지막 술을 한방울까지 씻어 털어내고 플라스틱 바가지에 물을 퍼서 좍좍 끼얹는다.정성스레 솔질을 해서 통을 헹 구어내면 당신의 작업은 끝이다.거꾸로 매달아논 술통은 햇빛에 반사되어 반지르르 윤기가 흐른다.그것은 마치 오동통하게 물기가 오른 성숙한 여자의 엉덩이같다.
“옛날에는 돈을 가마니로 세곤 했었지.네 증조부 때만 해도 보릿고개에 갈비 먹던 집은 우리밖에 없었다.술도가에 샘 마르는일 없듯 오동나무 궤짝에 돈 비는 날이 없었어.술맛도 기가 막혔니라.이곳저곳 전전하던 떠돌이 작부,광대도 우리 술맛은 잊지못해 꼭 다시 얼굴을 내밀곤 했으니까.” “이 양반이 또 시작이네.그깟 케케묵은 고리짝 얘기는 꺼내서 뭘해.쟤도 들을 만큼들은 이야기,이젠 진력이 날 거구만…….고만 좀 하시구랴.” 정주간 앞 툇마루에 오도카니 앉아 옥수수 수염을 다듬고 있던 어머니가 드디어 말참견을 하고 나선다.아버지는 미간을 찌푸린다.그리고는 다시 허공으로 던졌던 시선을 거두며 계속한다.
“그 비결은 물에 있었다.석빙고보다 차가운 천길 지하수를 끌어올려 빚은 술이었으니 임금님도 구경 못할 신선주였지.한량이셨던 니 증조부님은 도포자락에 호리병을 꿰차고 유람하며 술맛을 자랑하고 다니셨단다.증조모 초상을 치르던 날에도 외 지에서 마악 돌아와 행장을 벗어던지고 술판 속에 끼여 어깨춤을 들썩이시던 양반이야.니네 할아버지는 또 어떠셨고? 바람둥이에 노름꾼이셨지.화투장을 쥔 날이면 곳간에 쌀가마니 나가는 소리가 어린 내 귀에도 싸르락싸르락 들릴 정도였으니까 .그래도 양조장을 팔아넘기지 않으신 걸 보면 신통하지 뭐냐.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그때 벌써 노름빚으로 팔려나갔어야 옳다.양조장이 이 꼴이 되니 오히려 그분들 뵐 낯이 없구나.” “뵐 낯이 없으시긴요.다세월 탓이지요.” 마당 한켠을 가로질러 쏜살같이 내달리는 쥐 한마리를 보며 나는 별 감동없이 대꾸한다.고즈넉이 내리쬐는 햇살 때문에 나는 잠시 그 마당이 소금밭이 아닌가 착각한다.거북등처럼 금이 간 빛바랜 주황색 양철지붕도 소금기가 묻은 듯 누렇게 떠보인다.
힘겹게 일을 끝낸 아버지는 쓴웃음을 희미하게 베어물며 내가 앉아있는 평상,벽오동 그늘 밑으로 걸어오신다.
아버지와 나는 벽오동 나무 그늘에 적당한 거리를 두고 앉아 있다.나무 밑동에 등을 기대어 앉은 아버지의 모습이 빈 지게 하나 만큼의 무게로 다가온다.
지칠줄 모르는 푸르름,사람도 한여름의 벽오동처럼 영원히 젊을수만 있다면.세월이 흐르고 또 흘러도 싱싱한 수맥을 품은 저 나무들처럼 오래도록 푸르를 수만 있다면…….
“모두들 거품이 들었어.그래서 거품 든 술들만 찾는 게야.”아직도 옛날의 술도가집 생각을 떨쳐내지 못한 아버지의 성글어진속눈썹 끝으로 빠르게 새털구름이 지나간다.서리가 허옇게 내린 당신의 머리칼.나는 불쑥 말한다.
“염색 좀 하시지 그러세요?” “……왜,내 머리가 보기 싫으냐?” 아버지는 머리를 쓸어넘기며 은근한 어조로 되묻고,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허,네가 보기 싫다면 해야지.……그럼 해야지.” “뭐,백발이 아름답대나 어쩐대나 해쌓더니,꼴 좋수!” 어머니가 모들뜨기눈을 하고 쏘아붙인다.
“마누라 말은 콧등으로 흘려 넘기는 양반이 딸년 한마디엔 냉큼 그러마고 해요? 자식이 무섭긴 무서운갑다.” 아버지와 나는마주보며 소리나지 않게 웃는다.저 소리없는 웃음은 또 언제 보았을까.아버지가 짓는 웃음의 능청스러움 속에서 나는 지난 한때의 어느날,그와 똑같은 누군가의 얼굴이 있었다고 어슴푸레 떠올린다.그러나 내 기억의 곳간에서 그것을 집어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나는 이내 그런 때가 있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린다.그리고 아버지에게 말한다.
“제가 염색해 드려요?” “허이구,시집을 가더니 니가 이제야철이 들었구나.늙은 애비 염색까지 할 생각을 다하고…….” 어머니가 힐끗 건너다보며 또 참견이다.당신의 무릎 앞에는 이제 감자 바구니가 놓여져 있다.나는 서둘러 마당의 햇살속을 가로질러 간다.
“염색약 어딨어요?” “안방 문갑,마지막 서랍이다.너무 시꺼메도 볼썽사나우니까 갈색을 좀 섞어야 헌다.” 문갑의 마지막 서랍속에서 지저분하게 얼룩진 어머니의 염색도구가 얼굴을 내민다.묻은 염색약이 그대로 굳어진 사발과 칫솔,손잡이가 달린 빗.
철저하게 아버지를 위한 도구이면서도,당신은 정작 손 한번 대본적이 없는 물건.나는 그것들을 정겹게 챙겨 든다.
그러나 어머니는 결국 염색약을 풀고 섞는 일만은 당신이 손수맡아 해야 한다고 고집을 피운다.아무래도 경험없는 딸애 손에 내맡기기에는 미덥지 않으신 모양이다.
나는 양조장 사무실에서 나무걸상을 가져와 벽오동 그늘 밑에 세운다.그리고 아버지를 앉혀 신문지옷을 씌운다.목 아래로 덧씌운 신문지옷 때문에 아버지는 얼핏 가설무대 위의 어릿광대 같다. 나는 피식 실소를 날리면서 아버지의 이마와 양 귓불에 크림을 바른다.끈끈하고 투명한 크림 속에서 버짐같은 저승꽃들이 그대로 비쳐나온다.아니,크림을 바르지 않았을 때엔 별로 눈에 띄지 않았던 것 같은데,그것을 바르고 나자 아주 선명 하고도 확실한 화상자국인 양 드러나 괜시리 속이 상한다.염색약이 든 사발과 빗을 챙겨 든다.접시속의 염색약은 독약 같다.
“초벌구이는 칫솔로 해야 헌다.” 어머니가 말했다.눈은 감자바구니에 고정되어 있으면서 말은 부처님이다.신문지옷 위로 벌써검은 방울이 하나 뚝 떨어진다.신문지 안에서 꼼지락거리던 아버지의 손이 내 손목을 슬그머니 잡는다.
“얼마나 살다 간다고,꼭 이짓을 해야 쓰겄냐?” “아버지도,참.약,튀어요.” 나는 숱이 듬성듬성한 아버지의 흰 머리칼에 조심스레 염색약을 바르기 시작한다.한 줄기 바람이 신문지옷을 슬쩍 건드리고 지나간다.아버지가 목덜미에 끼워 넣은 신문지 한자락을 다시 추슬러 넣는다.
“그럼 기왕 하기로 나선 일,얼룩지지 않게 하거라.네 에미처럼 정수리를 허옇게 남겨놓으면 안돼.” “걱정 마세요.어머니도깜짝 놀라실 거예요.
자,고개를 드세요…….” 나는 머리 뒤쪽부터 서서히 염색약을발라 간다.아버지의 손에 쥐어진 손거울에 가끔씩 내 얼굴이 비친다.또 스스로 찬찬히 비춰보는 아버지의 얼굴은 수수깡처럼 여위고 조심스럽다.당신의 시선이 머무른 곳은 어느새 투명한 크림속에서 번 져나오는 저승꽃이다.
“어,시원허다.니 손길이 닿으니까 머리털이 죄다 새로 나는 기분이구나.” 염색약을 고루고루 바르며 빗질을 하자 아버지는 이제 귀여운 사무라이 같다.그러나 약기운 탓인가,당신은 어느결에 졸음을 참지 못하고 슬그머니 고개를 숙인다.옅게 코까지 골며 가수(假睡)에 빠진 모습이 이번에는 영락없는 어린애다.감자처럼 매끄러운 아버지의 정수리를 들여다 본다.성근 머리칼 속으로도 드문드문 검버섯이 피어 있다.세월을 거꾸로 흐르게 할 수만 있다면.손끝에 묻은 염색약을 보며 나는 목덜미의 주름살까지도 펼 수 있는 약은 없을까 잠깐 생각한다.
려놓은 사발을 집어들려는 데 한순간 아버지의 몸이 기우뚱 중심을 잃고 무너진다.재빠르게 몸을 옮겨 막아서지 않았더라면 대책없이 나동그라졌을 상황이었다.아무 것도 모른 채 딸의 허리에기대어 곤한 잠을 자고 있는 당신의 얼굴이 한없이 초라하다.
벽오동 잎이 흔들릴 때마다 땅위에 깔린 그림자가 너울너울 춤을 춘다.머리 속이 어지러워지며 지난날 잊혀졌던 풍경 하나가 떠올라 내 어깨를 붙잡은 건 그때였다.
남한산성.그래,그것이었지.오년전,신혼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던 길에 남편과 잠시 들렀던 곳.그때도 지금처럼 선선한 초가을 바람이 이마를 적시고 있었다.능선을 따라 산허리를 감고 뻗어있던산성 아래서 남편은 내게 무슨 말을 했던가.
“이 산성처럼 내가 당신을 지켜줄게.크고 튼튼한 돌만 쌓아서성벽 안에 있는 당신이 다치지 않게……약속할게” 내 손을 꼬옥잡으며 속삭였다.나는 당장 전쟁이 일어난다 해도 무섭지 않을 것같았다.
성문을 지나 가을꽃이 만발한 산길에서 그는 문득 걸음을 멈추고 소리쳤다.
“저기 백합이 있어.저기 좀봐!산속에 백합이 피었네.” 그의손가락이 가리킨 곳에는 산나리 하나가 곱게 피어 있었다.나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말했다.
“저건 백합이 아니고 나리꽃이에요.산나리라구요.” “아무튼 백합하고 똑같이 생겼잖아.잠깐만 있어 보라구.내가 저걸 꺾어 올테니까.” 말릴 새도 없이 남편은 성큼성큼 숲을 헤집고 들어갔다.그러더니 바위 사이에 수줍게 핀 산나리 하나를 꺾어 나를향해 흔들었다.그는 꺾어온 산나리를 내손에 쥐어주면서 장난기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수로부인! 이 꽃을 받으시지요.” 어이가 없어 한참을 웃고나서 꽃을 들여다보며 나는 말했다.
“암술과 수술이 나란히 하늘거리는 게 꼭 우리 사이 같애.”우리 사이…….이제는 그 사이에 강 하나가 흐르고 있다.나는 망연히 하늘을 바라본다.수백송이의 산나리가 새털구름 사이에 흔들리는 것 같다.암술과 수술을 하늘거리면서.
가지런한 빗질로 염색을 끝내고 나니 해가 어느새 설핏 기울었다.아버지는 이리저리 손거울을 비춰보며 기분좋은 낯색을 감추지못한다. “내가 아닌 것같다.사람들이 다 웃을 게야.늘그막에 웬 주책이냐고….” “그래도 한 이십년은 젊어 보이니,좋으시죠?” “이십년 전이면 니가 어지간히 말썽을 부릴 때지.술밥 널어놓은 걸 마구잡이로 집어먹고 혼절했던 생각 나냐?” “그럼요,면장이 아니었으면 그대로 얼어죽었을 걸요.” “그래,그랬었지.면장이 아니었으면 그때 널 잃었을지도 몰라.” 지붕 위에 잡초가 무성한 면장네 창고를 아버지는 시린 눈으로 바라본다.지금은 죽고 없는 그는 양조장 뒤켠 허름한 창고에서 살았었다.민대머리에 날이 흰 머리카락이 몇올 철사처럼 돋아나 있던 면장은,평생 꿈이 면장이라서 면장으로 불리 던 사람이다.그래서 그는 누군가 자신을 향해.면장! 면장!'하고 불러줄 때 가장 큰소리로 대답하곤 했다.
그는 젊었을 적부터 술에 중독되어 평생 양조장의 상머슴으로 살았다.보수도 없이 밀가루 부대를 나르거나 술통을 닦는 일을 도맡고는 남들이 보는 앞에서 저장탱크의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한 바가지씩 막걸리를 퍼마시는 게 그의 유일한 낙 이었다.면장은 양조장의 일 뿐만 아니라 집안의 온갖 궂은 일을 다 도맡아했는데 잔칫날이나 제삿날에 닭이며 개,돼지를 잡는 백정 노릇도그중 하나였다.
언제던가,면장은 우물가에서 돼지를 잡았었다.그가 검은 식칼로돼지의 목을 찌를 때 나는 뒤란에 있었는데, 돼지의 비명이 어찌나 크고 통절하던지 그만 겁에 질려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그러면서도 그 소리가 잠잠해졌을땐 나는 시나브로 우물가에 와있었다.핏물에 흥건히 젖은 면장의 아랫배와 그가 쥐고 있던 날선 식칼.내 시선은 얼어붙은 듯 칼날을 향해 고정돼 있었다.마치 식칼이 내 눈에라도 들어와 박힌 것처럼.지금도 선명하게 나는 희번득이는 그날의 칼날을 잊을 수가 없다.
죽은 돼지는 벌써 펄펄 끓는 가마솥 물을 흠뻑 뒤집어쓰고 나와 털을 뜯기는 중이었다.어머니는 선홍의 선지피가 반쯤 담긴 양동이를 난짝 들고 부엌으로 향하면서 애들은 그런데 얼씬거리면안된다고 손사래쳐 쫓았지만 난 한 발짝도 움직이 지 않았다.검은 돼지가 하얗게 털을 벗기우고 맨살을 드러낼 때까지.면장의 날랜 칼질에 의해 뱃속 창자가 붉게붉게 꺼내져 나올 때까지.
일을 마치고 면장은 늘상 하던대로 막걸리 한사발을 들이켰다.
그의 입에서 흘러내리던 허연 물줄기,추레한 재건복 속으로 젖어들던 막걸리.
내가 열살이 되던 해 겨울이었다.아랫마을 큰집 제사를 치르러온 식구가 집을 비웠을 때,나는 아무도 몰래 건조실에 들어가 덕석에 널린 술밥을 한 웅큼 집어먹었다.그리고 다시 또 한번.
시큼달큼한 그 맛에 빨려들어 몇 주먹인가를 계속 먹고 나서는 이상하게 정신이 그만 혼미해지는 것을 느꼈다.물을 마셔야겠다고어렴풋이 생각하면서 우물이 있는 곳으로 걸었다.그러나 내 키보다 큰 항아리를 두어개쯤 돌아 지났을까.나도 모르게 스르르 주저앉고 말았다.잠에 빠져든 것이었 다.으스스 한기가 느껴졌지만더이상 몸을 움직일 기력이 없었다.
그날 밤,제사를 마치고 돌아온 어머니는 어디서도 당신의 딸을찾을 수가 없었다.온 집안이 발칵 뒤집혔다.큰집 식구들까지 동원되어 온 동네를 찾아 헤맸지만 허사였다고 한다.나를 찾아낸 사람은 결국 면장이었다.술 한잔 들이켜기 위해 발효실에 들어왔다가 발견했다고 했다.시궁창 냄새가 폴폴거리는 면장의 가슴팍에안겨 그곳을 빠져나오던 기억이 새롭다.얼마나 지독한 체취였는지혼미한 잠조차 멀리 달아나버릴 지경이었다.
면장은 오년 전 어느 겨울날,술이 엉망으로 취한 채 창고바닥에 널브러져 자다가 동사(凍死)했다고 한다.그러나 과연 단순한동사였을까.나는 왠지 그렇게 생각되지 않았다.그가 마신 술 속에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극약 같은 건 들어 있지 않았을까.아마 그랬을 것 같은 확신이 뚜렷한 이유도 없이 한동안 내 뇌리를 사로잡았다.
***아 버지는 일가친척 하나 없는 면장의 시신을 곱게 화장해서 양조장 가까운 뒷산에 골고루 뿌려주었다.나는 집에 와서 그 말을 듣고 며칠 밤을 꼬박 악몽에 시달려야 했다.면장의 혼령이 양조장의 허공 중을 날아다니다 내게 손을 뻗쳐오는 꿈, 뒤엎어진 술항아리들이 사람처럼 바로 일어나 나를 향해 걸어오는꿈. “안 보면 잊혀지는 게지.이제 그이 얼굴이 감감하구나.”아버지는 의자를 들고 천천히 집 안으로 들어간다.
마음 한 귀퉁이가 구멍이 뚫린 듯 허전해진다.그렇게 그리워하지 않아도 아버지 역시 머지않아 면장 곁으로 가게 될 것이다.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 또렷해지는 그의 눈길.지금이라도 살아 비틀거리며 나를 향해 걸어올 것같다.남편이 죽고 난 후에도 그가생각날까.따뜻한 그의 눈길이 외진 산 속 나무둥치에 핀 버섯처럼 문득문득 내 가슴을 비집고 돋아날 수 있을까.
이혼 수속 중에 그의 담당의사를 만난 게 화근이었다.돌아서면남남이 되어 영원히 그의 소식을 듣지 않을 수도 있었는데.의사는 남편이 간암 말기가 되는 지경에까지 아무 것도 모르고 있던나의 무지함을 나무랐다.
“본인에게는 기회를 봐서 알리도록 하시지요.환자는 지금 안정을 취해야 합니다.절대로 자극이 되는 행동은 삼가시구요.” 물먹은 솜을 지고 가는 우화 속의 당나귀처럼 나는 휘청거리며 집으로 돌아왔다.내 꾀에 내가 넘어간 꼴이 되고 말았다.마지막으로 단 한번,동정심이 불러일으킨 보호자 자격으로 갔던 것인데.
그의 알콜중독은 도대체 어느 정도냐고,다만 그 질문만 던지고 돌아설 참이었는데.
장방형의 넓은 난간,베란다라고 부르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일제식 건물의 이층 옥상에는 장독대와 건조실의 공장 굴뚝이 솟아 있다.웬만한 소운동장만큼 넓은 대지에 덩그라니 계단식으로 엇갈려 지은 이층집은 술공장이 아니면 전혀 쓸모가 없 게 만들어져있는데,기역자로 꺾인 난간에선 감나무 가지나 오동잎이 그대로 만져진다.담장을 타고 산발인양 뻗어오른 호박넝쿨,장독대 밑의 푸른 이끼,이곳저곳 정겹지 않는 곳이 없다.
양조장 뒤쪽 텃밭은 마치 정글속 같다.살구만한 열매가 열리는개사과나무,얼굴보다 더 넓적한 잎새를 펄럭이는 벽오동,감나무며밤나무 같은 과실수들이 심어져 있는데,여름이면 호박넝쿨이 올라와 텃밭의 반을 다 덮어버린다.풀이 무성하고 나무들이 넝쿨에 감겨 얼기설기 뜨개질을 해놓은 듯 얽혀있다.씨줄과 날줄도 없이헝클어진 줄기들.호박넝쿨은 야생의 군락지라도 형성해 놓은 듯 무섭게 뻗어나간다.이미 줄기가 굵을대로 굵어져서 헤치고 뜯어내기도 어려운 형국이다.혓바닥처럼 싱싱한 호박잎은 나름대로 그늘을 만들어 그 아래 식물들은 햇빛조차 제대로 받을 수 없다.양치류의 질긴 식물들과 거미줄도 어둑신한 분위기를 한껏 북돋운다.햇볕이 들지 않아서인지 땅은 늘 축축히 젖어 있었다.특히 키작은 무화과 나무 가 많아서 동네 아이들이 자주 열매를 따러 담장을 넘곤 했다.천막같은 호박넝쿨 아래로 뱀과 족제비,도둑고양이,쥐들이 마냥 돌아다녔다.저녁이면 어디선가 수많은 하루살이들이 몰려와 뒤뜰을 점령했다.생대처럼 자란 깻잎들,푸른 이끼,변소의 슬레이트를 덮은 등나무 넝쿨.
“초가을 볕이라도 오래 쬐면 해롭다!” 인기척 없이 다가온 어머니가 내 어깨에 가만히 손을 얹는다.당신의 성긴 머리칼 역시 곧 염색을 해야 되지 않을까 싶다.
“며칠 안 남았구나.출국이 언제라고 했지?” 나는 열손가락을펴 보인다.모레 올라가는대로 은행에 가서 환전하고 이혼신고만 마치면 그만이었다.호적이 정리되지 않아 서류상으로는 아직도 그의 아내인 셈이다.
“마지막이라고 생각지 마라.언제 어떻게 될 줄 모르는게 세상일이야.아버지 건강도 심상치 않고.부쩍 말수가 적어지셨어.” “자주 편지 할게요.요즘은 외국도 바로 이웃이에요.비행기 타면겨우 하루 거린데요 뭐…….” “그래도 바다 건너 타국이다.전화 한통 쉽게 할 수 있는 곳도 아니고…….” “코리아타운이라고 해서 한국사람들도 많아요.다방도 있고 떡집,복덕방도 있고.
요즘은 슈퍼에서 김치,청국장도 다 사다 먹을 수 있는 걸요.”“저번엔 텔레비전에서 검둥이들이 한국사람 가게를 다 태우더구나.총질까지 해대고 백주에 사람까지 죽이고.” “지금은 괜찮아요.오히려 더 사이가 좋아진 걸요.” “비온 뒤에 땅이 굳듯이 말이냐? 하여튼 넌 어릴 적부터 들들 들개 역마살이 끼었었다.
” 가슴을 쓸어내리는 것도 태연을 가장하기 위한 당신의 오래된습관이다.
나는 할말을 잃는다.그러나 떠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가 있다는 것을 설명할 방도가 잘 떠오르지 않는다.이 땅이 싫어서?***43면에 계속 글=은현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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