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기고>아산 소녀가장 집단 성폭행-남은 과제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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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8면

자살시도는 L양의 소리없는 절규였다.그러나 사건직후 주위에서는일제히 피해자의 품행문란이나 성적 방종을 문제삼기에 급급했다.
그러다 보니 피해자의 안전한 보호와 이후 대책에 대해서는 속수무책이었다.
성폭력 관련 단기 보호시설인 열림터는 안전한 피신처 제공과 상담프로그램의 지원을 주목적으로 한다.때문에 그 아이가 필요로하는 교육이나 장기적 양육문제 해결등 총체적 지원 대안을 내놓는 데는 한계가 있다.또한 L양에게는 가족이라는 기존 보호체계가 있어 피해자 지원체계를 구축하는데 걸림돌이 된 것도 사실이다.이런 사안은 정부가 성폭력 피해자를 위한 장기적 플랜을 갖고 보호체계와 치유체계를 접목시켜야 하는 과제이기에 사정은 더했다. 단기간 열림터에 머무르다 퇴소한 L양의 밝지않은 생활의전면모를 전화상담을 통해 접하며 우리는 긴장했다.이런 저런 과정을 거치면서 그 아이를 가장 잘 이해하게 됐던 사람중 하나로서 책임을 통감하게 된다.
애초 삶에 대한 기대 따위를 말할 능력조차 없었던 그 아이의우울증과 무력감은 장기화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학교생활마저 여의치 않은 그 아이로선 그나이 또래가 갖는 친구사귐은 진작 포기해야 했을테고 결국 억지로 출석일수를 메우러 다닐 수밖에 없었을 게다.
L양의 새로운 삶을 위한 가장 시급한 처방은 환경을 바꿔주고이전 상황이 재연될 수 있는 구조를 단절시키는 것이다.동네에서가해자들과 수시로 접하거나 또 다른 소문등으로 피해사실이 뒤늦게 노출되는 것은 피해자로 하여금 과거 악몽을 되살리게 만들 것이 분명하다.이는 결국 주변의 호기심과 비난의 눈초리를 스스로 견디지 못하게 하는 요인이 될 수 있다.
L양이 피해사실의 노출을 엄청난 두려움으로 간주할 것은 당연하다.그녀를 위해 환경개선과 더불어 전문가의 지속적이고 장기적인 심리상담을 병행해야 하는 것은 그런 연유에서다.피해자를 장기적으로 보호하고 교육문제.양육문제를 체계적으로 책임질 수 있는 개인이나 사회적 지원체계를 활용해 장래를 보장해줘야 하겠다. 구체적 대안으로 제시됐던 외국입양도 다시 거론할 필요가 있을 것같다.그것은 L양의 성품 확인은 물론 성폭력에 대한 사회적 시각을 재점검하는 계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L양이 포부로 삼고 있는 양궁을 해결수단으로 하는 것도 방편이 된다.그 아이가 말하는 유일한 객관적 관심사가 바로 그것이기에 다양한 통로를 마련해 준다는 점에서 바람직할 것이다.
L양이 어디를 가든 성폭력으로 인해 상처받은 자존심을 회복시키는 프로그램은 필수적이다.모든 희망을 상실한 피해자에게 새로운 삶의 기대를 심어줄 수 있는 대안이 무엇인가는 이제부터 다시 고민해야할 과제다.
현혜순〈한국성폭력상담소 보호시설 열림터 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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