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96 이 사건-아산 소녀가장 집단 성폭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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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8면

지난 7월 전국을 경악케 했던 충남아산 소녀가장 집단성폭행사건의 당사자 L(11)양.할머니와 단 둘이 살면서도 구김살 없었던 초등학생이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농약을 마셨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사람들 가슴은 쓰라렸다.정부 고위층은. 관계자 엄벌'을 명령했고 세상의 온정도 줄을 이었다.이후 반년.그녀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을까.그 행적을 따라가는 길은 주위의 무관심속에서 깊은 상처를 입었던 한 소녀를 치유하기에 우리 사회가 얼마나 무기력한 존재인가를 확인하는 과 정이었다.
사건 당시 그 아이의 손에 쥐어져 있었던 것은 농약병.동네 청년 10여명으로부터 몇개월동안 당했던 끔찍한 일 때문이라는 대목에 이르러선 모두들 허탈감에 사로잡혀야 했다.그리고 어김없이터져나왔던 타락한 이 땅의 윤리와 도덕에 대한 한 탄들.
L양은 음독후 1개월만에.기적적으로'소생했다.기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것이 L양이 마신 약은 단 몇방울만 먹어도 살아나기 힘든 맹독성 제초제였기 때문이다.그녀를 치료한 순천향대병원홍세용 내과과장의 경우“치사량이 넘는 농약을 삼 키고서도 흔히나타나는 폐 손상 하나없이 회생하게 된 것은 큰 축복”이라며 다행스러워할 정도였다.
죽음의 문턱에서 돌아온 L양이 퇴원 직후 몸.마음의 상처를 치료받기 위해 서울의 한 요양원으로 들어갈 때까지만 해도 그녀에게 드리울 새 인생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다.한 재미동포 목사는 적극적인 입양의사를 밝혀왔고 자민련 소속 한 국회의원도 L양의 미국입양에 적극 나서겠다고 했다.
게다가 그녀에겐 익명성이 보장되는 환경을 찾아가 생활하기에 어려움이 없을 정도의 돈이 마련됐다.약 7천만원.이는 고소를 취하하는 조건으로 가해자들로부터 받은 합의금 6천만원과 전국에서 답지한 성금 1천만원을 합한 것이었다.하지만 L양의 퇴원직후 일은 비틀리기 시작했다.
경찰서 고발등 이 사건 폭로에 주도적인 역할을 해온 고모(40)와 J(40)목사,그리고 할머니(74) 사이에 이견이 생겼다.모두들.진정 그 아이를 위한'양육안을 내놓았지만 서로의 주장이 평행선을 달렸던 것이다.주변에선 돈을 둘러싼 갈등이라고들했는데 최종확인은 불가능한 상태다.
처음 J목사는“애를 내가 책임지고 미국에 입양시키겠다”며 그녀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갔다.여기서 보름정도 머무르는 동안 할머니와 고모,J목사의 불신의 골은 깊어졌다.한 재미동포 목사의입양제의 역시“아이를 선교목적으로 이용하려 한다 ”는 고모.J목사의 반대와“아이를 절대 데려갈 수 없다”는 할머니의 반발에부닥쳐 좌절됐다.
갈등이 계속되자 고모와 J목사는“더 이상 관여하지 않겠다”며손을 뗐다.이후 L양은 지난 9월 할머니가 새로 이사한 곳으로거처를 옮겼고 전학을 했다.그런데 문제는 할머니가 얻은 1천만원짜리 전세방이 지난번 살던 집에서 불과 4㎞ 거리에 불과한 곳이었다는 점이다.“사고무친의 곳으론 절대 갈 수 없다”는 할머니의 고집때문이었다.학교에서도,동네에서도 그녀는 늘 아는 사람과 마주쳐야 했다.결국 L양은 학교를 빼먹기 시작했다.할머니가 자주 집을 비우는 통에 그녀는 하루종일 홀로 지내는 날이 많아졌다.
L양은 가출한 여자친구들을 사귀기 시작했고 급기야 주변엔 남자들까지 얼씬거렸다.아마도 외로움 때문이었을 것이다.다시 소문이 흉흉해졌다.할머니는 11월 다시 이사를 했다.이번엔 15㎞떨어진 이웃동네였다.예전 마을사람들이 늘상 드나 들긴 마찬가지였다.학교를 또 옮겼지만 L양은 역시 거의 등교하지 않았다.이웃마을에서 왔으니 곧 모든 것이 알려질 것이라는 막연한 두려움때문이었다.하지만 할머니는 상담원들은 물론 학교 선생님들과의 대화조차 단절시키려 하면서“중학교에 도 보내지 않겠다”는 얘기까지 서슴지 않고 있다.
올초까지만 해도 친구들과 어울려 고무줄 놀이와 네모찜(흙바닥에 금을 그어놓고 뛰는 놀이)을 하며 운동장을 뛰어다니던 그녀였다.선생님을 만나면 쪼르르 달려가 팔짱을 끼고 아양을 떨었던아이가 지금은 하루종일 방안에 틀어박혀 있다.간 혹 집밖엘 나와도 유흥가를 기웃거릴 뿐이다.이것이 끔찍한 범죄로 상처를 입고 사회적 이목을 집중시켰던 한 아이가 6개월이란 시간동안 변모한 모습이다.
L양은 아직 자신에게 닥쳤던 일의 의미조차 잘 모르고 있다.
단지 수치스럽고 뭔가 크게 잘못된 것같다는 막연한 불안속에 하루하루를 보낼 뿐이다.앞으로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는 것은 물론이다.
“어제는 옷정리하다 양궁부 체육복을 봤어요.시합을 앞두고 아침 일찍부터 밤 늦게까지 운동장을 뛰고 선생님께 기합도 받으며친구들과 꼭 우승하자고 손가락을 걸었던 일들이 떠올라 갑자기 눈물이 쏟아졌어요.” 양궁부에서 주장으로 활동했던 그 아이기에평범한 학생으로 돌아가고 싶을 때마다 활쏘던 장면들을 상기한다.“할머니와 고모가 허락해줘 미국을 가게 된다면 꼭 양궁을 계속하고 싶어요.” 정신적 방황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L양의 현재 모습을 바라보는 것은 슬픈 일이다.하지만 우리 사회에서 이 아이에게 해주는 건 아무것도 없다.“학교 가서 친구들과 놀고 싶어요.그런데 못 가겠어요.미국에 가고 싶기도 해요.
하지 만 허락안하실 거예요.전 사실 제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어떻게 해야 하는지 도무지 모르겠어요.” 갈팡질팡하는 이 아이의 5년 뒤,아니 바로 내년의 모습을 떠올리는 일은 정말이지 우울하다.

<강주안.이상복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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