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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으로가는간이역>8.직지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5면

직지사에 가고 싶었다.일기예보에서는 눈이 올거라고 했다.눈이내리면,직지사 비로전 지붕이 온통 하얗게 눈으로 덮이면,두 손으로는 귀덮개를 하고 그 광경을 보고 싶었다.
직지사역(直指寺驛)이라는 이름을 가진 기차역이 있다.경북금릉군대항면에 있는 간이역.1925년 문을 연 오래된 역이다.
보통 간이역에는 역무원이 없거나 있더라도 네 명인 경우가 대부분이다.두 명이 한 조가 돼 하루 근무하고 하루 쉰다.직지사역의 역무원은 여섯 명.세 명씩 조를 이룬다.간이역이라도 할 일이 많기 때문이다.
직지사역을 통과하는 기차는 화물열차 70편,승객열차 1백30편등 하루 2백편.많다.하지만 그 가운데 정작 직지사역에 정차하는 기차는 비둘기호 열차 단 4편 뿐이다.역에서는 표도 팔지않는다.직지사역은 수많은 기차가.그냥 지나가는' 역인 것이다.
“간혹 직지사에 가시겠다고 내리시는 분들이 있지요.역 이름이직지사역이잖아요.하지만 여기서 절까지는 상당히 먼 길입니다.무엇보다 많이 걸어야 하니까요.” 부역장 김홍선(44)씨는 이곳에서 내리려는 승객들에게“혹시 직지사에 가려거든 그냥 계속 타고 가서 김천역에 내려 버스를 이용하라”고 일러준다고 했다.
직지사역에서 직지사까지는 약 4㎞.하지만 그것은 산을 가로지른 직선거리를 말하는 것이다.역에서 내려 절까지 가기 위해서는30분 남짓 마을길을 걸어 도로까지 나와야 한다.도로에서 다시직지사행 버스를 기다렸다가 타고가면 10분 정 도 걸린다.그래도 걸어가겠다고 내리는 사람들이 간혹 있단다.
“배낭 멘 학생들이 많고요.나이드신 분들도 계시고…..시골길을 걷게 돼 잘됐다'고 하는 이들도 있지요.” 직지사역을 나서마을길로 접어들면 한없이 펼쳐진 포도밭을 보게 된다.여름이면 포도 단내와 그 단내를 맡은 벌들의 잉잉거림으로 가득한 곳.직지사역이 있는 대항면과 이웃 봉산면은 모두 2천여가구가 7백80㏊의 포도밭을 일구고 있다.전 국 포도 생산량의 13%정도가여기에서 나온다.
겨울의 포도밭은 고요하다.석양빛에 잠겨있는 인적없는 넓은 포도밭.오래된 묘지를 생각하게 하는 겨울 포도밭에는 마른 가지를지탱하는 수많은 버팀목들이 줄을 맞춰 늘어서 있다.단내와 꿀벌이 가득한 여름이어도 좋다.찬 바람과 마른 가지 뿐인 겨울이라도 상관없다.언젠가 직지사역에 내려 직지사로 향하는 그 포도밭사이길을 걸어볼 수 있다면 그것은 행복한 일이다.
포도밭 사이를 걸어 도착한 직지사.직지사의 아침에 눈이 내렸다.찬 물에 머리를 감고 숙소를 나서보니 밤새 내린 눈이 황악산을 하얗게 뒤덮고 있었다.
눈은 계속 내렸다.바람은 없다.대빗자루로 경내에 쌓인 눈을 쓸어내리는 보살의 입에서는 하얀 입김이 연신 새어나온다.입김은눈속으로 섞여들어가 하늘로 올라간다.
직지사는 신라 눌지왕 2년(서기 418년)에 아도화상이 창건한 고찰이다.한때 쇠락했으나 지금은 전각만 65동에 이르는 큰절이 됐다.녹원 스님이 1958년 주지로 부임한 이래 일으킨 수많은 불사(佛事)덕분이다.
비로전 지붕에도 눈이 가득했다.비로전에는 고려 태조때 조성한천불상이 모셔져 있어 천불전이라고도 부른다.1천개의 불상.모습은 모두 제각각이다.천불상을 보고 있으면 자신도 모르게 자신과가장 닮은 불상을 찾게 된다.그리고 석가의 마 지막 당부를 떠올린다. “그러면 여러분! 이별이다.모든 것은 변하는 것,게으름없이 노력하기를.” 눈 내리는 직지사 비로전 앞에 서서 1천개의 불상을 헤아리고 있으면 석가가 남긴 그 마지막 당부의 의미를 알 것도 같다.

<김천=최재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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