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시석방서 복귀않기까지 긴장의 24시간-페루 인질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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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이원영(李元永)페루대사가 20일 밤 게릴라들과 페루정부간 메신저 임무를 띠고 복귀 조건부로 풀려난 후 21일 밤 임무종료를 선언하고 완전 자유의 몸이 되기까지 24시간은 숨막히는 긴장의 연속이었다.간신히 빠져나온 사지(死地)로 다 시 돌아갈 수도 없고,그렇다고 나몰라라 하자니 인질로 남아있는 다른 외교관들과의 신의문제와 나중에 게릴라들로부터 보복당할 가능성도 있어 대처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이보다 앞서 비슷한 조건으로 풀려난 3명의 외교관들의 사례를참고할 수밖에 없었으나 이들의 대처방법은 제각각이었다.독일 대사는 나몰라라하고 현업에 복귀했고,그리스 대사는 본국의 훈령을빌미로 귀국했으며,캐나다 대사만 메신저 임무를 수행했다.캐나다대사는 첫날에는 일본 대사관저로 찾아가 회신을 전달했지만 다음날에는 페루당국이 출입을 저지한다는 이유로 관저 정문 앞에서 성명을 낭독하고 임무종료를 선언했다.
캐나다 대사의 처신이 원용할만 했으나 상황은 당시와는 조금 달랐다.같이 풀려난 페루 정치인 2명이.일 만들기'를 좋아하는반정부 인사인데다 입까지 험해 자칫하다가는 정치적으로 이용당하기 십상이었던 탓이다.
李대사등 5명은 풀려난 직후 브라질 대사관저에서 회합을 가졌다.대사들은 페루 정치인들과는 별도로 메신저 역할을 수행하기로방침을 정했다.李대사는 이날 밤늦게 한국 대사관에 돌아와 외무부에 상황을 보고했다.메신저 임무는 수행하되 일 본 대사관저로직접 가는 대신 국제적십자사를 통하는게 좋겠다는 훈령이 내려왔다. 21일 오전 3명의 대사는 모처에서 만나 이렇게 처신하기로 일단 합의하고 게릴라측의 구두 메시지와 인질로 잡혀있던 페루 정부 고위관계자들의 서한 메시지를 페루 정부측에 전달하고 회신을 받았다.이 작업은 예상보다 시간이 많이 걸려 당초 복귀시한인 정오를 넘겨 오후 늦게서야 끝났다.그러던중 돌발 변수가생겼다.브라질 대사가 본국정부의 급거귀국 훈령을 받고 떠난 것이다.李대사는 다시.사정변경'을 외무부에 보고했다.오후7시쯤 훈령이 다시 떨어졌다.브라질 대사의 처 신에 관계없이 일을 추진하라는 내용이었다.李대사와 사미 티 이스마일 이집트 대사는 바로 이집트 대사관저에서 미하엘 미니히 국제적십자 페루대표를 만났다.미니히 대표는 음식물 전달등 자연스럽게 게릴라들과 접촉하는 과정에서 메시지를 전달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다만 인도적 단체라는 성격상 메시지는 문서 대신 구두로 전하겠다고 했다.두 대사는 이에 동의했고,부담스런 메신저 임무는 공식 완료됐다.
[리마=김동균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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