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라당의 ‘강만수 저격수’ 김성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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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식(서울 관악갑) 의원은 자칭 서민경제론자다. 김 의원 홈페이지 초기화면의 슬로건도 ‘서민이 행복한 경제’다. 실제로 ‘서민’이란 단어는 그의 삶을 관통하는 가장 깊숙한 키워드였다. 김 의원은 부산에서 태어났다. 평안도 출신인 부모님이 한국전쟁 때 피란 오면서 부산에 정착했다.

아버지는 트럭 운전사였다. 김 의원은 “어릴 때는 아버지 트럭인 줄 알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남의 차였다”고 회고했다. 어머니는 시장 좌판에서 옷가지를 늘어놓고 장사를 했다. 고2 때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어머니가 생계를 책임지게 됐다. 어머니는 전혀 안면이 없던 한 타월 회사를 무작정 찾아가 “3남매를 키워 내야 하니 석 달만 그냥 물건을 대 달라. 나중에 반드시 갚겠다”고 간청해 회사 간부를 설득해 냈다. 이 일화는 아직도 김 의원 가족사에 잊히지 않는 한 페이지로 남아 있다.

김 의원은 서울대 경제학과 77학번이다. 유신체제 밑에서 민주화 투쟁에 앞장섰던 긴급조치 세대다. 2학년 때 그는 유신철폐 시위를 하다 구속됐다. 서울대에 입학했을 때 “하늘을 날 것 같다”던 어머니가 면회를 왔다. 어머니는 “네가 옳은 일을 한 걸 안다. 다만 책은 손에서 놓지 마라”고 격려하셨다고 한다. 김 의원은 “서민과 어려운 이웃을 위하는 일이 ‘옳은 일’이란 확신을 그때 갖게 됐다”고 말했다. 김 의원은 지금도 어머니를 봉천동 집에 모시고 산다.

김 의원은 연애결혼을 했다. 고교 1학년 때 흥사단 연합서클에서 만난 여학생과 11년 연애 끝에 결혼했다. 아내는 고교만 졸업하고 전자회사에서 기능공으로 일했다. 이래저래 김 의원과 ‘서민’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인연인 셈이다.

그런데 그는 한나라당 의원이다. 1997년 3김 시대 극복에 앞장섰던 고 제정구 의원을 따라 한나라당에 입당했다. 90년 장기표·김문수씨 등을 도와 민중당에도 참여했던 그였다. ‘한나라당에 있는 게 어울린다고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그는 잠시 말을 끊더니 “업보이자 운명이라고 생각한다”고 짧게 답했다. 그는 “처음에는 참 어색했지만 앞으로가 중요한 거 아닌가”라며 “한나라당이 미래지향적 정치를 펼치도록 하는 것도 한국 정치에서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2003년엔 통상 재선급 의원이 맡는 한나라당 제2정조위원장을 원외로는 최초로 맡아 화제가 됐다. 당시 그는 정부·여당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근로소득세 경감 ▶중소기업 법인세 인하 ▶사교육비 절감을 위한 EBS 인터넷 수능 프로그램 신설 등 서민을 위한 각종 정책을 입안해 주목을 받았다. 올해 18대 국회 들어와서는 ‘여당 내 야당’이란 소리를 많이 듣는다. 고환율 정책과 재정지출 확대 기조를 통렬히 비판해 ‘강만수 저격수’라는 닉네임도 얻었다. 그는 “한나라당이 기득권층의 대변자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며 “경쟁력 강화와 사회안전망 확충을 동시에 추진해 성장의 열매가 저소득층에도 골고루 돌아가게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서민경제를 늘 주목하고 가난이 세습되지 않는 사회를 꿈꾸는 그. 집권여당 내 야당을 자처하는 그가 서민경제론을 어떻게 실현해 갈지 지켜볼 일이다.

박신홍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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