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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 ‘민간 보험의 벽’ 결혼·취업보다 넘기 힘들다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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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호 12면

조울증세로 치료받고 있는 정신장애인 이경훈(38·가명)씨. 그는 지난해 모처럼 맞은 여름휴가를 가족들과 계곡에서 보내기 위해 A보험사의 여행자 보험에 가입하려다 거절당했다. “장애인은 일반인에 비해 사고 위험이 높기 때문에 가입할 수 없다”는 게 보험사 측의 답변이었다. 이씨는 “여행을 하는 데 아무런 결격사유가 없음에도 단지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보험 가입을 막는 게 말이 되느냐”며 억울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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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통사고로 20년 가까이 휠체어를 이용하고 있는 정병주(49·가명·지체장애 2급)씨의 경우 연금보험에 가입하려 했지만 대부분의 보험회사로부터 거절당했다. 가전제품 관련 자영업을 하며 비교적 안정적 생활을 하고 있지만 그 역시 장애인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결국 정씨는 부인을 피보험자로 연금보험에 가입했다.

정부가 2005년 실시한 장애인 실태조사에서 보험계약 시 차별을 받아 봤다는 장애인은 전체 응답자의 39.8%에 달했다. 각급 학교 입학이나 결혼·취업 때보다 더 많은 장애인이 차별의 벽에 부닥친 것이 바로 민간보험 분야다.

실제로 대부분의 보험사는 내부 약관을 통해 장애인의 가입을 막고 있다. 유명 대형 보험회사 11곳의 약관을 조사해 본 결과 11곳 모두 ‘만 15세 미만자, 심신상실자 또는 심신박약자를 보험대상자(피보험자)로 하여 사망을 보험금 지급 사유로 한 계약의 경우’ 보험계약을 무효로 처리한다는 조항을 두고 있다. A사의 생명보험 담당자는 “해당 조항은 상법 제732조와 같은 내용으로, 장애인에 대한 차별이 아니라 보험금을 노린 범행의 대상에 장애인이 이용되는 것을 막는 데 목적이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장애인들의 생각은 다르다. 장애인인권센터와 장애여성네트워크 등 장애인단체들은 “보험회사들이 상법 조항을 자의적으로 확대해석해 모든 장애인을 심신상실자 혹은 심신박약자로 간주하고 있다”며 “장애인에 대해 사회가 얼마나 배타적이며 막연하고 근거 없는 차별을 자행하고 있는지를 보여 주는 것”이라고 반발하고 있다.

어렵게 보험에 가입했다 하더라도 장애인에겐 여전히 넘어야 할 벽이 있다. 지체장애 2급인 김태훈(가명)씨는 2005년 부인의 권유로 B사의 암보험에 가입했다. 그러나 김씨는 장애 판정 검사를 다시 받아야 했다. 민간보험의 기준이 건강보험과 다르기 때문이었다. 보험료 역시 사고를 당할 위험이 더 크다는 이유로 비장애인보다 높게 책정됐다. 한림대 의대 황성희(신경과) 교수는 “일반적으로 장애인이 비장애인에 비해 사고가 일어날 위험률이 높다는 의학적 통계는 찾아보기 어렵다”며 “더구나 장애인의 해당 질병과 관련 없는 보험 상품 가입을 거부할 만한 근거는 없다”고 말했다. 예를 들어 청각장애인들의 암보험 가입이 거절되거나 보험료를 높게 책정하려면 청각장애인의 암 발생률이 일반인보다 높다는 근거가 있어야 하지만, 실제로 그런 통계는 제시된 바 없다는 것이다.

이같이 근거 없는 ‘업계의 관행’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장애인은 항의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그러나 올 4월 장애인차별금지법이 시행되면서 상황이 조금씩 바뀌고 있다. 이 법 제15, 17조 등은 보험서비스 제공 시 장애인을 배제하는 경우 최대 3000만원의 과태료를 물도록 규정하고 있다. 국가인권위 장애차별팀 관계자는 “법 시행 후 장애인 스스로가 권리를 찾기 위해 진정서를 제출하는 현상이 두드러진다”며 “8월 현재까지 인권위에 진정된 장애인 보험 가입 차별 건수는 22건에 달한다”고 전했다.

보험사 역시 법 시행 전후로 변화를 시도하고 있다. 삼성생명 장명훈 과장은 “사내통신망을 통해 직원들에게 장애인 차별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지속적으로 공지하는 한편 이의가 제기되는 경우 본사 차원에서 사건을 심사해 장애인이 차별받지 않도록 하고 있다”고 말했다.

인권위는 2005년 8월에 이미 “상법 제732조가 정신적 장애인을 보호하고자 하는 취지였으나 장애인 개개인의 구체적 상황에 대한 고려 없이 획일적으로 보험에 대한 접근 기회 자체를 박탈하고 있다”며 법무부에 이 조항을 삭제하도록 권고한 바 있다.

장애인의 보험 가입을 거절하거나 보험 조건에서 불리하게 취급하는 것은 평등권을 침해하는 차별행위라는 것이다. 법무부 측은 “인권위로부터 권고를 받은 뒤 특별분과위원회를 구성해 이 문제를 논의했다”면서 “장애인 차별 소지가 있는 조항이긴 하지만 이를 삭제할 경우 장애인이 보험사기 및 관련 범죄 등에 이용당할 위험성을 무시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법무부는 이 조항을 삭제하는 대신 심신박약자 중 의사능력이 있는 자에 대해 보험 가입을 허용하는 내용을 담은 ‘상법 보험편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한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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