全.盧씨 비자금사건 선고 의미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16일 내려진.全.盧씨 비자금 사건'항소심 선고 결과는 기업인들에게 경제적 위치에 걸맞은 도덕적 책무를 명백히 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특히 재판부는 과거 정치인과 기업인들의.뒷거래'에 대해 유죄를 인정하면서도 실제로는 집행유예등으로 관대한 처분을 내려.죄와 벌'사이에 절묘한 균형을 선택했다.
이번 판결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부분은 이원조(李源祚)피고인에 대한 실형선고와 변칙 실명전환에 따른 업무방해 혐의로 기소된 정태수(鄭泰守)한보그룹명예회장.이경훈(李景勳)대우그룹 미주회장에 대한 무죄선고.
이원조씨는 89년 5공비리와 93년 동화은행 비리등으로 세차례 검찰 수사를 받고도 구속을 피해.억세게 운좋은 사나이'로 통했으나 이번에는 감옥행을 피할 수 없을 것 같다.
담당 재판부인 서울고법 형사1부(재판장 權誠부장판사)는 비자금사건에 대해“지상의 수로로 흘러야할 물이 지하의 미로로 흘렀을 때 그 잘못은 지상수로를 막아 정상적인 흐름을 방해하고 지하미로를 넓혀놓은 사람들에게 있다”고 정의했다.
따라서.이러한 지하미로의 총체적인 설계자로서 책임이 무겁다'며 李씨에 대한 실형선고 이유를 설명했다.
다만 재판부가 법정구속은 하지 않아 李씨는 대법원에서 원심이확정되면 곧바로 수감된다.
이와 함께 盧씨의 비자금을 변칙 실명전환해 업무방해 혐의로 기소된 정태수.이경훈피고인의 무죄선고는.금융실명제'의 한계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논란이 계속될 전망이다.
재판부는“금융실명제에 관한 긴급명령상 실명은 주민등록표상의 이름이나 사업자등록증상의 이름으로 하도록 하는 것이고 금융기관은 이러한 이름만 확인하는 것이지 자금 출처와 실소유자를 확인할 법적 근거가 없는 것이므로 업무방해죄는 성립되 지 않는다”고 밝혔다.
이는 금융실명제의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는.차명계좌'에 대해현행법상 처벌 근거가 없다는 점을 확실하게 함으로써 금융실명제운영상의 한계점과 법의 미비점을 드러낸 것이다.
한편 1심에서의 실형선고로 세간의 관심을 집중시켰던 김우중(金宇中.대우그룹).최원석(崔元碩.동아그룹).장진호(張震浩.진로그룹)회장에 대한 집행유예 판결은 이미 예견됐던 일이다.
애당초 검찰도 이들에 대해 항소하지 않음으로써 강한 처벌의지를 보이지 않았다.여기에다 현재의 어려운 경제여건등도 고려된 것으로 보인다.
재판부는 이들 기업인들의“선거자금이거나 연말.추석때 관행상 건네준 헌금”이라는 주장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지하 미로론'을 통해 가볍게 처벌하면서도“지하의 문이 열려있다고 해서 돈을 쏟아넣은 점에 대해서는 책임이 있다”며 유죄를 인정했다.

<양선희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