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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글씨도 그림이다” 서예의 반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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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오늘날의 서예계는 죽었다’는 험한 말이 공공연하다. 서예는 대중의 외면 속에 ‘그들만의 리그’로 침잠하고 있다. 그러나 가능성이 없지만은 않다. 이번 간송미술관 가을 정기전에 몰린 20만 인파는 혜원의 ‘미인도’만 본 게 아니라 추사의 글씨도 눈여겨봤다. 손글씨 상표도 부쩍 늘고 있다. 이 같은 관심이 살아 있는 서예가에겐 오지 않는다는 게 지금의 서예계가 직면한 현실이다. 그래서 찾았다. 서예의 전통에 든든히 발을 디디고 있되, 21세기 서예가 나가야 할 새로운 시도를 하는 이들 말이다.

권근영 기자

전정우, 캔버스에 색깔 넣은 글자
66체 천자문-문자추상

심은의 문자추상 ‘무(無)’ 시리즈 중 첫번째, 49×66㎝. [심은서실 제공]

전정우, 캔버스에 색깔 넣은 글자... 전정우(60)씨는 나이 서른아홉에 다니던 대기업에 사표를 냈다. 서예·전각·한문 공부를 한 지 10년 만이었다. 서예는 여초 김응현, 전각은 구당 여원구, 한문은 해오 김관호 선생에게 각각 배웠다. 사직한 그해 국전 대상을 수상한 뒤 ‘심은(沁隱)’이라는 호로 살았다.

2004년부터는 문자추상과 천자문 쓰기에 도전했다. 천자문이 뭔가. 1000자 250구 125절에 천문지리와 인간사의 이치를 압축한 서사시다.

또한 1000자 중 겹치는 글자가 단 한 자도 없어 서체 연구에 그만이다. 서예가가 도전할 만한 경지다. 갑골문, 마왕퇴죽간, 추사체 등 문헌으로 접할 수 있는 서체들은 거의 다 붙들고 늘어졌다. 만 4년간 66체 240종을 완성했다.

이와 함께 캔버스에 아크릴로 그림 같은 글자를 쓰기 시작했으니 그게 문자추상이다. 즐겨 쓰는 글자는 ‘무(無)’와 ‘화(和)’. 사람이 손을 잡고 있는 듯한 획에 적·청·황·흑·백 오방색을 썼다. 한자를 모르는 이도 쉽게 아름답다고 감응할 만했다. 서양화가 등 다른 장르의 사람들과 꾸준히 교류하면서 21세기의 서예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고민한 결과다. 그래서 그는 “현대 서예가 별건가. 현대인이 쓴 것이 현대 서예다. 색깔 넣고 그림 그리듯 하는 게 아니다. 획의 기본이 없으면 서예라 할 수 없다”고 강조한다.

허회태, 획 하나로 우주의 기운 응축
손글씨에 감성을 담다

무산(茂山) 허회태(52)씨는 다섯 살 때부터 서예를 익혔다. 전남 승주군 집성촌에서 서당 훈장을 하던 백부에게 배우다가 초등학교 고학년 때 순천시로 전학해 벽강 김호 선생을 만났다. 이후 남서울대 중국학과로 진학했다. 글씨만 쓰기보다는 이론을 배우고 싶어서였다. 상명대 대학원에 진학해 한국화의 대가 이종상 석좌교수에게 그림을 배웠다.

무산의 이모그래피 일체무애(一切無碍), 2000×6000㎝. [이모그래피연구원 제공]


이렇게 걸어온 길의 결과물이 손글씨에 감성을 담은 이모그래피(emotion+calligraphy)다. “획의 기운생동, 회화의 조형성 두 가지를 버무려 글씨에서 감성을 찾는 시도를 하고자 했다”는 설명이다. 딱히 무슨 글자를 썼다기보다는 한 획으로 우주의 기운을 응축한 듯한 것이 그의 이모그래피다. 무슨 글자로 무슨 뜻을 전달했느냐를 판독하는 데 묶여 서예에 다가오지 못하던 대중들도 그의 이모그래피는 쉽게 이해한다. 그의 작품은 장롱에도, 한복 드레스에도 응용됐다. 작품을 이렇게 현실 세계와 가까이 한 그이지만 “서예의 생명은 기운생동하는 획”이라며 기본기를 강조했다.

기존의 서단에 대해서도 쓴소리다. “요즘 세계 미술계의 설치미술과 퍼포먼스는 서예의 병풍과 휘호와 그 맥이 닿아 있지 않나. 점 하나에 우주를 응축하는 이우환 선생의 작품은 서예적이라 할 수 있지 않겠나. ”

◆전시 메모 ▶66체 천자문·문자추상전=11월 13∼23일 연세대박물관(02-2123-3340), 11월 30일∼12월 21일 심은미술관, 12월 22일∼1월 22일 부남미술관 ▶이모그래피, 허회태 서·화·각 예술 47년전=11월 10일까지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전관(02-580-12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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