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마음, 진공될 때까지 비워야 신의 소리 들을 수 있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5면

지난달 31일 서울 종로구 신문로 2가의 서울역사박물관에서 ‘국제 선도(仙道) 컨퍼런스’(주최 국제선도문화연구소)가 열렸다. ‘선도’는 동양의 3대 사상인 유(儒)·불(佛)·선(仙) 중에서 선의 수행법을 일컫는다. 강당에는 국선도와 단전호흡, 기체조 등을 연구하는 학자와 수련자들이 대거 참석했다. 발표자들은 ‘원효사상과 민속학’ ‘전통 정원 문화와 신선사상’ ‘단전호흡과 스트레스 매니지먼트’ 등에 대한 다양한 의견을 내놓았다.

지난달 31일 서울 역사박물관에서 열린 ‘국제 선도 컨퍼런스’에서 김흡영 교수가 ‘다석 유영모의 영성수련’이란 주제로 발표하고 있다.


그런데 ‘뜻밖의 손님’이 있었다. 목사이자, 신학자인 김흡영(59·아시아신학자협의회 공동의장·강남대 신학부)교수였다. 그는 ‘다석 유영모의 영성수련’이란 주제를 들고 강단에 올랐다. 기독교와 선도, 어찌 보면 둘은 ‘물’과 ‘기름’이다. 그런데 김 교수는 “현대희랍적 이원론의 영향을 받은 서구 기독교는 몸과 마음을 나눈다. 그러나 나는 성경에 있는 대로 그게 둘이 아니라고 본다. 그래서 몸 수련 전통이 강한 선도의 얘기를 들어보고, 그 속에서 기독교 영성에 대한 얘기도 던지고 싶었다”고 말했다.

다석학회 회원인 김 교수는 “기독교계에서 다석 유영모 선생은 대중적으로 많이 알려진 분은 아니다. 하지만 다석의 기독교, 다석의 영성에는 매우 주목할 부분이 있다. 나는 그게 한국 기독교 영성의 광맥이라고 본다”며 ‘다석’을 택한 이유를 밝혔다. 발표 후에 커피숍에서 그를 따로 만났다. 그리고 ‘다석의 기도, 다석의 영성’을 물었다.

-‘다석의 사상’이 왜 한국기독교 영성의 광맥이라고 보나.

“한국 개신교에는 아쉬움이 있다. 몸과 마음을 고르고 닦는 영성수련법이 빈약하다는 점이다. 말로는 ‘성령! 성령!’외치지만 말이다. 다석 선생은 신학교육을 전혀 받지 않았다. 대신 성경을 거의 외다시피 했다. 그는 조용히 정좌해 말씀을 깊게 묵상하면서 깨달음을 얻었다. 그러한 다석의 영성수련법은 소중한 자원이며, 한국 개신교에 큰 길잡이가 되리라고 본다.”

-다석은 어떤 식으로 성경을 읽었나.

“다석은 그냥 읽지 않았다. 철저하게 자기의 실존 속에서 읽었다. 자신의 존재를 말씀에 던져 누에가 뽕잎을 씹듯이 철저하게 씹어 먹었다. 그래야 성경의 말씀이 ‘남의 소리’가 아니라, 누에고치가 뽑아내는 비단실처럼 ‘제소리’가 돼 나온다고 했다.”

-그럼 다석의 구체적인 영성 수련법은.

“세 마디로 요약된다. ‘몸성히’ ‘맘놓이’ ‘바탈퇴히’. 이게 순 한글로 표현한 다석 선생의 영성 수련법이다. ‘몸성히’는 말 그대로 ‘몸을 성하게’란 뜻이다. ‘성하게’는 ‘온전하게’, ‘본래대로’란 의미다. 우리의 몸은 하나님의 성전이다. 그래서 숨을 쉬는 것이 기도를 하는 거다. 다석은 숨을 들이마시면서 하나님을 받아들이고, 숨을 내쉬면서 하나님에 대한 나의 믿음과 공경을 바쳤던 것이다. 그 호흡을 24시간 놓치지 않은 것이다.”

다석 유영모는 호흡하는 숨 하나하나 속에서도 나와 하나님의 관계성, 그리고 기독교 신앙인이 된 의미를 놓치지 않고 음미하고, 묵상하며, 숨을 쉬었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다석은 생전에 “‘기도를 드린다’가 아니라, ‘호흡을 드린다’라고 하는 게 옳다”고 말했다.

-‘맘놓이’는 무슨 뜻인가.

“성경(빌립보서 2장7절)에 나오는 ‘케노시스(kenosis·자기 비움)’를 뜻한다. ‘맘놓이’는 마음을 내려놓는 거다. 곧, 마음을 비우는 거다.”

-그 마음은 어디까지 비워야 하나.

“마음은 진공이 될 때까지 비워야 한다. 그래야 제대로 맑아져 참소식, 곧 신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 그러나 나의 회개와 참회가 끝나지 않으면 결코 진공이 될 수가 없다. 다석은 ‘마음을 비워 진공을 만들어야 한다. 몸 성히 비어 있으면 영원히 맑고 맑아진다. 이승에서가 아니라, 죽음을 넘어 저승에서도 그러하다’고 말했다.”

-순한글이라지만 낮설다. ‘바탈퇴히’가 뭔가.

“‘바탈(自)’은 나의 바탕, 즉 ‘자아’를 뜻한다. 또 ‘퇴히’는 ‘태우다(燃)’와 ‘태워 나간다(乘)’란 뜻이 동시에 있다. 그래서 ‘바탈퇴히’는 자아를 태워 나가는 거다. 나의 못된 버릇과 악한 바탕을 끊임없이 태워 변화시켜나가는 ‘성화(聖化)’의 과정을 말한다. 그래서 다석은 ‘나 밖에 없다. 단지 내 바탈을 태워서 새 바탈의 나를 낳는 것밖에 없다. 종단에는 아주 벗어버리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사실 김 교수는 지난달 31일∼11월2일 미국 시카고에서 열리는 ‘미국 종교학회(American Academy of Religion)’에 참석할 참이었다. ‘미국 종교학회’는 전 세계의 종교학자와 신학자들이 모이는 학술대회다. 거기서 향후 수년 간 전개될 세계 신학과 종교학의 담론이 결정된다. 그런데도 김 교수는 인천공항에서 발길을 돌렸다. “출국 직전에 ‘선도 컨퍼런스’에 참석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죠.” 유명한 남의 잔치보다는 소박한 제 마당의 잔치를 택한 것이다. 그리고 선도 수련자를 향해 ‘기독교 영성’을 풀어 놓았다.

글·사진=백성호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