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쓰는가정문화>23.형식화된 가족행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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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주부 김정옥(37.경기도고양시일산동)씨는.나가요'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가족들 생일이면 생일,모임이면 모임,하나같이 밖에 나가 치르자는 주의다.음식 위주인 우리네 모임 풍토에서 주부에겐 모두가 즐거워야 할 행사날이 괴로운 날로 변하기 일쑤기 때문이다.
.나가서 해요'를 외치는 주부가 어디 김씨뿐일까..좁은 집,부족한 일손'을 탓하다 보니 집을 옮겼다고 해 친지들을 초대하는 집들이마저 밖에 나가 치르게 돼 정작 집구경은 못할 정도다. 그러다 보니 비용도 적지 않은 부담이 된다.초대받은 쪽도 빈손으로 얻어먹기가 찜찜하기는 마찬가지.심지어 초대하는 쪽이나받는 쪽 모두 피차 부담스러운데 아예 생략해버리자는 방향으로 의견이 모아지기도 한다.
하지만 생활이 바쁘면 바쁠수록 함께 살지 않는 가족간에 얼굴을 마주 대할 기회란 이런저런 집안행사때뿐이 아닐까.번거롭고 부담스러우니.밖에 나가 때우자'든가.그냥 넘어가자'가 아니라 모두가 바쁜 현대생활에 걸맞은,시간과 품이 가능한 한 덜드는 방식으로 가족행사 문화를 바로잡는게 현명한 대안이라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남들 눈을 의식한 형식보다 참여하는 가족들 한사람 한사람이 진심으로 즐길 수 있게 내용을 중시하는 쪽으로 발상의 대전환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박기태(62.서울은평구불광동)씨는 올해 생일에 늘상 뷔페등에서 치러온 잔치 대신 온천으로의 가족여행을 제안했다.충남 도고에 콘도를 잡고 아들딸 내외와 손자.손녀까지 10여명이 함께 떠난 1박2일 여행은 더할나위 없이 즐거웠다.김치 며 불고기감등 필요한 음식은 집집마다 나눠 준비해 갔다.
“쓸데없는 사람 모두 불러모아 치르던 잔치보다 돈은 돈대로 덜 들고 우리 식구끼리 오붓하게 보내니 두배로 좋은 셈”이었다는 박씨는 일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생일로 이번 여행을 기억한다. 갖가지 가족행사를 준비하는데 드는 시간과 돈.품을 함께 나누는 것 역시 가족간에 자주 자리를 함께 하고 정을 나누기 위한 필수조건이라 할 수 있다.늘 한사람에게만 커다란 짐이 지워지는 상황에서 진정한 의미의 즐거운 가족모임이란 상 상하기 힘들어진다.
김은령(38.경기도과천시원문동)씨는 4년전부터 손윗 동서와 함께 매달 4만원씩 저금을 하고 있다.그새 모인 돈의 일부를 찾아 얼마전 시어머님 생신상을 차려드렸다.친척중에 이사가는 사람이 있을때,결혼이나 장례를 치를 때도 이 통장에 서.공동의 돈'이 나간다.“살림하는 처지에 일 있을 때마다 목돈이 나가는게 부담스러워 함께 저금하기 시작했어요.행사를 앞두고 돈 문제때문에 동서간에 서로 책임을 미루며 의가 상하는 사람들도 많잖아요.”맏이.둘째를 따지지 않고 모든 일에 똑같이 부담을 나누어 지다보니 행사가 많아도 인상 찌푸릴 일이 별로 없다는 얘기다. 보수적인 집안에선 야단날 일인지 모르나 이혜숙(32.서울노원구상계동)씨네는 아들 3형제가 제사를 돌아가며 모시기까지 한다.돌아가신 어른을 기리는 본래 의미는 퇴색한채 큰아들 집에대한 의무로만 여겨지던 제사를 형제가 서로 나누어 모시기 시작하면서 부담없는 가족모임으로 자리잡았다는 것이다.돌.생일.제사등 누구나 다 치르는 행사 말고 우리 가족만의 특색있는 행사를만들어보는 것도 가족행사 활성화의 한 아이디어가 될 수 있다.
서울.분당.광주에 3형제가 떨어져 사는 박숙희(36.서울노원구월계동)씨 가족은 김장철마다 전라도 광주 시댁에 총집결,.온가족 김장담그기 행사'를 연다.품이 많이 드는 김장이지만 여럿이 함께 담그며 즐겁게 일할 수 있는 것은 물론 솜씨 품평회등.부대행사'를 통해 가족간의 우의를 확인하는 장이 되고 있단다. <신예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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