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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평>'언어의 정치학'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미국유학 시절의 일이다.꼭 해보고 싶었으면서도 해보지 못한 것중 하나는 교수들의 이름을 불러보는 것이었다.이야기인즉,미국학생들은 우리식으로“손교수님”하고 교수의 성에.교수님'을 붙여서 부르는 것이 아니라“호철아”하는 식으로 이름을 친구처럼 자연스럽게 부르는 것이었다.유교적 전통속에서 자란 나로서는 이것이 처음에는 충격적이었지만 친근감이 있고 교수와 학생이라는 상하관계가 아니라 동등한 인격체로 대하는 것 같아 좋은 관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그래서 이를 따라 해보고 싶었지만 어렸을 때부터 몸에 밴 습관 때문에 몇번을 시도해보다가 실패하고 말았다. 미국에서 아이들을 키우다가 귀국한 사람들의 경우 이와는 다른.문화충격'으로 고생하는 것을 종종 보게 된다.이 역시 언어습관과 관련된 것으로서 높임말이 따로 없는 영어 구조에 아이들이 익숙해져 있어 어른에게“할아버지 밥먹어”하고.반 말'을 함으로써 버릇 없다는 오해를 받게 되는 경우들이다.
사실 영어를 비롯한 서구언어의 경우 명사.동사등에 특별히.높임말'이 따로 없다.그러나 우리 말은 동사도.해라'.하십시오'하는 식으로 높임말과 그렇지 않은 말이 따로 있고 밥과 같은 명사도.밥'.진지'처럼 높임말과 그렇지 않은 말이 구별돼 있다.문제는 높임말이 발달했다는 사실 그 자체가 아니다.높임말이 발달했다는 것은 상대방을 존대한다는 의미에서 오히려 바람직하다.그러나 우리말은 독특하게 신분적 상하관계에 있는 사람들간 대화의 경우 낱말 하나 하나에 한 쪽은 높임말을 쓰고 다른 한 쪽은 내림말을 씀으로써 두 사람간의 신분적 상하관계가 말속에 그대로 나타나도록 되어있다는 점이 문제다.
그 결과를 정치학적으로 보면 간단하다.우리 사회는 일상적인 언어생활 속에서 상하 위계적인 신분적 질서가 계속 확인되고 재생산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다시 말해.언어의 정치학'이라는 면에서,우리 말은 기본적으로.권위주의적'이고 우리 의 권위주의적 문화가 이같은 언어구조 내지 언어습관과 관계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결국 민주주의와 권위주의의 문제는 단순한 선거나 정부와 국민간의 관계와 같이 일반적으로 사람들이.정치'라고 부르는 것의 문제만은 아니다.오히려 매일,매일의 삶속에서 부딪치는 일상적인것들 속에서 확인되고,만들어지고 하는 것이기도 하다.소위.일상성(日常性)의 정치'라고 부르는 것들이다.
우리는.독재'하면 으레 군사정권과 같은.큰 권력'을 생각한다.그러나 영화로도 만들어진 한 인기작가의 소설.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처럼 국민학교의 학급친구 사이에도.작은 권력'을 둘러싼 권력관계가 있고 우리 사회에는.작은 독재자'들 이 사방에 널려 있다.다시 말해 고용주와 노동자,남편과 아내,부모와 자식,스승과 제자로부터 개인적 관계에 이르는 모든 사회적 관계,모든 인간관계에는 어느정도의 권력관계가 내재해 있고 따라서 모두민주주의의 문제들이다.최근 들어 일반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는가하는 일상적인 삶의 모습을 통해 역사를 이해하려는.사회사'가 인기를 끄는 것은 바로 이같은.일상성의 중요성'때문이다.
이같은 점에서 최근 교육개혁위원회가 학교를 민주주의를 체험하는 장소로 탈바꿈시키기 위한 획기적인 학교문화 개선방안을 내놓은 것은 무척이나 반가운 일이다.특히 교장.교감.교사.학생으로이어지는 상명하복(上命下服)의 권위주의적 체제를 민주적인 풍토로 바꾸는 한편 인간의 존엄성을 가르치고 폭력의 재생산 구조를막기 위해 체벌(體罰)을 금지하고 교사들이 학생들에게 높임말을쓰도록 한 것은 정말 잘한 일이다.
그러나 이같은.교육 민주화'.언어 민주화'는 시작에 불과하다.“시민권은 공장 문앞에만 오면 멈춘다”는 표현처럼 민주주의의사각지대인 일터,가부장적(家父長的)인 가정등 아직 문제는 많이남아 있다.이번 조치를 계기로 우리 속의.작은 독재자'를 돌아다 볼 시간이다.
손호철 서강대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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