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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 시조 백일장 10월] “가방 속 물건 보니 내 탐욕의 흔적이 …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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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장원 이순권씨

 “이순권 세무사 사무실입니다.”

무뚝뚝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장원으로 뽑혔다는 소식을 전하자 목소리의 톤이 높아졌다.

“제가요?”

놀란 목소리를 가다듬더니 “정신 좀 차리고 다시 통화합시다”라며 전화를 끊었다.

1시간 후. “정말 고맙습니다”라며 이순권(64·사진)씨는 허허 웃었다. 한동안 30~40대 주부들이 장원을 차지하기에 전혀 기대하지 않았다며 쑥스러워했다. 그러나 첫 도전에서 장원을 거머쥔 내공은 그의 시조에서 단박에 드러난다. 가방이라는 아주 평범한 소재에서 뒤적여낸 뭉클한 감동. 그 선이 굵다.

“어느 날엔가 퇴근길에 가방이 너무 무겁더라고요. 아, 여기에 도대체 뭐가 들었나 해서 천천히 들여다 봤죠.”

서류·책·손수건 등이 가방을 꽉 채워서 낡은 가방끈이 끊어질 듯했단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냥 물건이지만 다시 보니까 그게 아니더라고요. 사람들이 주고 받은 마음 같았죠.”

가방 속을 들여다 보며 이씨는 짧은 반성을 했다. ‘주고 싶은 마음’보다 탐욕이 더 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다음 날 아침, 부인이 가방을 정성스레 닦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가방에 진 얼룩이 새삼 애틋하게 느껴졌다.

“10여 년 된 가방이에요. 아침마다 집사람이 닦아주거든요. 반들반들하게… 생각해보니까 가방의 얼룩은 곧 내 얼룩인데 그걸 다독인다는 생각이 듭디다.”

그 고운 감성이 시가 됐다. 세무사로 25년 가까이 일해오며 늘 성실하게 집안을 이끌어 왔지만 ‘시 쓰기’에 대한 열망은 항상 가슴 속에 있었다.

“학교 다닐 때도 시조나 고문을 좋아해서 외우고 다녔어요. 교육학을 전공했지만, 시조에 대한 사랑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

그러다 중앙일보에서 시조시인 윤금초의 기사를 본 것이 계기가 됐다. 올 봄, 윤 시인이 가르치는 민족시사관학교에 들어가 체계적으로 시조를 배웠다. 시조를 쓰면서 “어두움 대신 밝음을 보게 되는 습관”이 들었다며 웃었다. “좋은 시조를 쓰고 싶어서 책도 많이 읽고, 2년 전부터는 틈틈이 글을 써왔지요.”

시 쓰는 게 취미생활이라는 그는 등산도 즐겨 한다. 산에 오를 때마다 시조를 구상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나이 들어 창작을 할 수 있다는 것’이 큰 즐거움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장성한 아들 둘도 그의 든든한 배경이다. ‘우리 아버지 대단하다’며 시조를 쓰는 데 큰 힘이 되어준다.

“시조의 매력이요? 우선 저한테 편안합니다. 그리고 정적이면서도 동적인 것, 그 교직미가 매력이죠. 참 아름다워요.”

  임주리 기자



■이달의 심사평   일상의 관찰서 엮어낸 잔잔한 감동

 ‘현대’시조는 현대에 대한 진단과 발견 등을 요한다. 우선 고시조의 낯익은 ‘관념성’과 ‘추상성’에서 벗어나는 새로운 시각이 필요하다. 그래서 절이나 산 같은 익숙한 대상도 자신의 시선으로 그리라는 주문을 거듭하는 것이다. 삶의 구체적 세목들을 정제된 형식 안에 담는 것은 쉽지 않지만, 그 과정에서 형식과 노니는 묘미도 나온다.

‘장원’에 이순권 씨의 ‘가방 별빛’을 올린다. 우리가 늘 ‘짐’을 넣어 들고다니는 가방의 존재를 새롭게 일깨우는 작품이다. 생의 반려처럼 묵묵히 걸어온 가방의 길과 그 안팎의 세월을 어루만지는 시선이 따뜻하다. 일상의 관찰에서 길어 올린 성찰과 함께 잔잔한 감동을 담보한 것도 미덕이다. 소재의 참신성도 엇비슷한 응모작들 중에서 돋보인 이유다.


‘차상’ 이정홍 씨의 ‘진주 남강’은 흐름이 유장하다. 3장의 운용이나 자연스러운 가락도 안정감이 있다. 그런데 중복이 섞여들면서 느슨해진 느낌을 준다. ‘슬픈 듯이 슬픈 듯이’ 같은 반복은 효과가 있다 해도, 서술의 중복은 경계해야 한다. 역사적 사실을 다루는 재현 중심의 작품들은 새 목소리를 내기 어렵다는 점도 유념하기 바란다.

‘차하’ 장은수 씨의 ‘비 그친 오후’는 단상을 스케치하듯 엮고 있다. 그런데 시적 대상이 서로 긴밀히 연결되지 않는 탓에 단편적 인상에 머문 느낌이다. 그 때문에 번호를 매겨봤는데, 이런 단상 소묘보다는 하나의 대상을 잡아 파고들어가는 게 힘을 더 길러준다.

시조 형식에 안 맞는 응모작이 아직도 나온다. 시조는 3장 4음보의 구조를 내면화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시상도 내면화가 길어야 그럴듯한 육화로 나아가듯, 형식도 내면화의 제련이 좋은 작품으로 이어진다.

심사위원 : 정수자, 권갑하



 ◆응모안내=매달 20일 무렵까지 접수된 응모작을 심사, 매달 말 발표합니다. 응모 편수는 제한이 없습니다. 응모 시 연락처를 꼭 적어주십시오. 장원·차상·차하 당선자에겐 각각 10만·7만·5만원의 원고료와 『중앙시조대상 수상작품집』(책만드는집)을 보내드립니다. 장원·차상·차하 당선자를 대상으로 12월 연말장원을 가립니다. 연말 장원은 중앙신인문학상 시조 부문 당선자로 인정, 등단자격을 부여합니다.

◆접수처=서울 중구 순화동 7번지 중앙일보 문화부 중앙시조백일장 담당자 앞(100-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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