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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해외칼럼

난민 아닌 난민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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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유엔은 내전과 폭력, 도시화와 개발, 자연재해로 자국 내에서 집을 잃고 떠도는 사람이 총 7700만 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이는 세계 인구의 1%로 프랑스나 영국, 터키의 인구보다도 많은 규모다. 이 사람들이 난민은 아니다. 국경을 넘어 다른 나라로 피란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이 처한 현실은 난민과 다르지 않다.

삶의 터전에서 쫓겨난 사람들, 폭력과 재해로 상처 받은 이들은 가진 것 하나 없이 불확실한 미래로 내몰린다. 쓰촨(四川) 대지진으로 집을 잃은 1500만 명의 중국인, 종파 분쟁으로 고향에서 쫓겨난 200만 명 이상의 이라크인, 그리고 유혈 분쟁을 피해 도망친 수백만 명의 수단·소말리아인을 생각해 보라. 최근 10년간 내전으로 집을 잃은 사람은 1900만 명에서 2600만 명으로 늘었다. 이재민도 수백만 명이나 된다. 하지만 이들이 처한 곤경은 오랫동안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각국 정부와 국제사회가 그들을 보호하고 도와야 한다는 사실을 제대로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유엔은 이 같은 ‘국가 내 난민’을 위한 지침을 1998년 발표했다. 이 지침은 지난 10년간 부족하긴 하지만 눈에 띄는 성과를 보였다. 피해자들의 현실에 대한 인식을 높였고, 정책 변화를 이끌어 냈다. 그들이 기본적인 삶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수십억 달러를 모금했다. 이러한 노력 덕분에 수많은 생명을 구할 수 있었다. 인도주의적 노력은 유엔 중앙긴급구호기금(CERF)을 통해 계속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난제들이 남아 있다. 기후변화로 인한 이재민 숫자가 계속 늘어나고 있다. 전 세계에서 매년 5000만 명이 홍수·허리케인·쓰나미(지진해일)·지진·산사태로 피해를 보고 있다. 집을 잃는 것은 한순간이지만 그 영향은 세대를 넘어 이어진다. 98년 중미를 강타한 허리케인 ‘미치’ 피해자들의 경우를 보라. 깨끗한 물과 쉼터, 보건 서비스가 장기간 제공돼야 한다. 부유한 나라라고 예외는 아니다.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지나간 지 2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수천 명의 미국인이 임시 숙소에 머물고 있다. 민병대·반군 등이 민간인을 쫓아내기 위해 테러를 자행하는 사례도 계속 늘고 있다. 콩고·소말리아·이라크 등이 대표적인 예다. 총성이 멈춘 뒤에도 수백만 명이 가난에 시달리고, 차별받고, 정신적인 상처로 고통받고 있다.

난민촌의 삶은 비도덕적이고 비인간적이다. 세계는 수단 다르푸르의 비극에 대해선 알고 있지만, 또 다른 수백만 명이 하르툼 빈민가와 전국의 난민촌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은 잘 모른다. 그들은 극도의 빈곤에 허덕이며 삶을 재건할 희망조차 갖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다.

우리는 국내 난민의 발생을 막아야 한다. 홍수 방지 제방 구축, 지진 경보 강화 같은 간단한 대책만으로도 수많은 생명을 구할 수 있다. 방글라데시와 모잠비크 같은 나라들의 사례가 이를 증명한다.

분쟁 상황에서 난민 발생을 막기 위해선 정치적 의지가 필요하다. 국제법을 어겨가며 시민들을 내쫓는 이들에 대해선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반드시 책임을 물어야 한다. 분쟁에 관계되지 않은 국가들 또한 난민의 귀향을 도와야 한다. 분쟁 지역의 평화협정에 반드시 이 같은 내용이 언급돼야 하며, 평화유지 활동에도 강제돼야 한다.

분쟁은 계속될 것이고 자연재해는 늘어날 것이다. 그 근본 원인을 밝히고 난민 발생을 줄이는 일은 피해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데서부터 시작돼야 한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 그들이 원하는 것을 이해하고 그들의 권리를 존중해야 한다. 국제사회가 도움을 줄 수는 있다. 그러나 각 나라 정부가 앞장서야 한다. 유엔 국가 내 난민에 대한 지침이 마련된 지 10년, 더 이상 변명하거나 머뭇거려서는 안 된다.

존 홈스 유엔 인도주의 업무 담당 사무차장
정리=김한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