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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와남>편견 있는 우리말 또 하나의 性차별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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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3면

이갈리아라는 나라에서는 여성을 가리키는 말이 「움(wom)」이다.이 말은 사람 일반을 뜻하기도 한다.남자는 「맨움(manwom)」이라 불린다.여성의 성명 앞에 붙이는 경칭은 혼인 여부에 관계없이 「미즈」이고,남성은 기혼일 경우 「 미재스」,미혼일 경우 「스피너맨」이라는 경칭을 쓴다.이갈리아는 노르웨이의작가 게르드 브란튼베르그가 쓴 소설 『이갈리아의 딸들』에 나오는 가상 공간이다.이곳에서는 남자를 뜻하는 「맨」이 인간 일반의 의미로도 쓰이며 여자만 혼인여부를 경칭에서부터 갈라놓는,현실의 언어가 역전돼 있다.작가는 남녀의 사회적 위치를 완전히 뒤바꾼 이 가상공간을 통해 사소해보이는 어휘 하나에서 감춰진 여성억압의 견고한 기제를 예민하게 읽어낸다.
직장내 성폭력 문제가 이슈의 중심에서 비껴선뒤 여성학계에서는일상적 언어속의 성차별 문제가 관심의 초점으로 떠오르고 있다.
문제는 겉으로 드러난 행위와 제도가 아니라 일상의 표층아래 잠복한 의식의 저층이라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는 것 이다.
한국사회언어학회(회장 박순함 외대교수)가 16일 언어와 성을주제로 심포지엄을 개최하고,여성개발원에서 언어에서의 성차별을 주제로 연구작업을 활발히 진행하고 있는 것도 이같은 흐름을 반영한다. 사회제도와 관행에 성차별이 있음을 알고있는 사람이라도언어에 성차별이 있다는 것은 얼핏 실감이 안날지 모른다.하지만언어학자들 말을 들어보면 문제는 의외로 간단치 않다.
이 방면에서도 선례는 서구에서 만들어졌다.영어권에서 가장 먼저 도마위에 오른 단어는 역시 「맨(man)」.남성을 뜻하는 이 단어는 사람 일반을 가리키는 단어로도 오랜 세월 거리낌없이쓰이다가 여성해방운동이 거세게 일어난 60년대 이후 웬만큼 눈치보지 않으면 사용하기 어렵게 됐다.
회장이라는 뜻의 「체어맨(chairman)」은 「체어퍼슨(chairperson)」 또는 「마더레이터(moderator)」라는 중립적 용어로 바뀌게 됐고,성이 확정되지 않을 경우에는 대명사도 「he」를 「he/she」「s/he」등으 로 바꿔 쓰거나 아예 「she」로 쓰는 페미니스트까지 생겨났다.「미스」와「미시즈」를 추방하고 「미즈」로 통일하자는 주장이 나온 것도 같은 맥락이다.
물론 우리말은 사정이 다르다.문법에서부터 남녀를 구분하는 서구(모든 명사를 남성.여성.중성으로 나누는 독어를 생각해 보라)에 비하면 우리나라는 적어도 언어에서만큼은 남녀 차별을 두지않아온 것처럼 보인다.오빠.누나같은 가족간 호칭 만 제외하면 남녀를 문법적으로 구분하고 있는 경우는 별로 없기 때문이다.그러나 속을 들여다보면 딴판이다.
우리말의 성차별은 문법이 아니라 어휘와 용법에 있다.숙명여대민혁식 교수는 「국어의 여성어 연구」라는 논문에서 어떤 어휘가남녀에 따라 차별적으로 또는 일방적으로 사용되는지 조사한뒤 흥미로운 결론을 제시하고 있다.
이 교수에 따르면 여성 외모 묘사어는 긍정적인 표현이 많지만성품 묘사어나 행동 묘사어에는 부정적 묘사어가 다양하고 압도적으로 많다는 것.
예컨대 행동 묘사어의 경우 긍정적인 표현은 「정숙하다」「얌전하다」「상냥하다」등에 한정돼 있는 반면 부정적 묘사어는 「교태」「앙탈」「새침떨다」「표독스럽다」「수다스럽다」등 질과 양에서 압도적 우위에 있다.
긍정적 묘사어가 이른바 현모양처 이미지 부근에 몰려있고 그 영역을 벗어나는 순간부터 갖가지 부정적 묘사어가 준비돼 있다는이 연구결과가 뜻하는 바는 별다른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신문기사에 나타나는 성차별 언어를 조사하고 있는 여성개발원의이춘아 연구원은 『가장 큰 문제는 남성을 판단 기준이자 모델이며 완전한 존재로 설정하고 있는 언어사용』이라고 지적한다.예를들면 「남성 못잖은」「남자도 하기 힘든」「여장 부」등의 남성중심적 표현이 이른바 「성공한」 여성을 묘사할 때 빈번히 동원된다는 것.
언어가 언어사용자의 문화를 반영할 뿐만 아니라 그들의 의식을규정한다는 것은 언어학계의 정설.성차별 언어는 성차별 문화의 산물이지만 역으로 성차별 언어는 성차별 의식을 언어사용자의 내면에 새겨놓는다는 것이다.자신이 지금 쓰고 있는 「악의없는」 말이 성차별 의식을 노출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점검하지 않으면안될 시대가 왔다.
□허문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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