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달아 높이곰 돋아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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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난 미인한테 장가갈거야.』 자못 당당한 기세였다.
『어떻게 생겨야 미인인데?』 뜻밖의 대답에 할멈이 따졌다.
『머리 좋고 예쁘게 생겨야 미인이지.그렇지 엄마?』 큰아들 맥은 을희의 동조를 얻어내려 했다.그 조숙함에 놀라는 한편 어째서 그런 「가치관」을 갖게 됐을까 궁금했다.
『머리가 꼭 좋아야해?』 할멈은 재미있어 하고 있었다.
『응,바보는 미인 아니야.』 『이렇게 영특하긴.』 맥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할멈이 덕담했다.
『암.요담 머리 좋고 예쁘게 생긴 왕비님같은 색시한테 장가들고 말고!』 『왕비님? 공주님은 아니고?』 이번엔 을희가 할멈에게 물었다.
『…우리나라의 옛날 역사 책을 보니까 공주님이 잘 생겼다는 얘기는 별로 없고 왕비님이 미인이었다는 얘기가 더 많던 걸요.
뭣이라더라? 아,신라 박혁거세왕(朴赫居世王)의 왕비도 아주 잘생겼었다던데요.』 「역사대학」 강의실에서 만난 젊은 여인을 바라보며 을희는 옛일을 멍하게 더듬고 있었다.희고 발그레한 살결과 늘씬한 몸매.품위있고 세련된 분위기의 이 보기드문 미인 이름이 바로 신라 시조(始祖)박혁거세의 왕비명 「아리영(娥利英)」이 다.
이상한 예감을 느꼈다.만약 맥이 이 여인을 만나게 되면….미리 깔려있는 어두운 사랑의 궤도를 본다.
아리영은 자기 아버지 일을 넌지시 꺼냈다.
경제담당 전직 외교관,정년 퇴직한 후로 농장과 목장을 경영하면서 『경제외교사』책을 집필중인데 원고가 마무리되면 출판 일에도움말 주십사는 것이었지만 바닥에 깔린 뜻을 을희는 쉬이 알아들었다.「친구」로 삼아달라는 것이다.
-친구.좋지.예순 고비를 넘긴 이 나이쯤 되면 또래의 남자친구는 꽤 둘만 하지.
을희는 속으로 뇌까렸다.
여자친구보다 든든하고,여자친구처럼 수다스럽지 않고,인생 경험과 지식의 온축 위에 나누는 대화에 깊이가 있고,젊어서는 자칫넘나들기 쉬었던 육체의 선을 이젠 의식하지 않아도 되고….
남녀간에 우정이란 성립될 수 없다고 단언한 것은 앙드레 모루아였다.다만 가능하다면 사랑하다 헤어진 남녀가 먼훗날 다시 만나게 된 경우일 뿐이라고 그는 덧붙였다.
그 주장을 이제야 알아들을만 했다.
섹스가 남녀의 「친구」됨을 방해하는 것이다.사랑하다 헤어진 남녀가 친구일 수 있다는 것은 이미 섹스를 초월한 사이이기 때문이 아닌가.그렇다면 서로 섹스를 의식지 않아도 될 나이 고비의 남녀는 비로소 친구일 수 있는 셈이다.
글 이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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