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포커스>콜을 기다리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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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독일통일은 현대사의 기적이다.통독(統獨)의 갑작스러운 실현을보고 인간의 상상력과 통찰력의 한계를 느끼기도 한다.통독에는 그만큼 우연의 요소가 많았고,그래서 역사는 우연인가 필연인가의논쟁까지 일으켰다.「통일총리」 헬무트 콜도 지 난주 발행한 『나는 독일통일을 원했다』라는 자서전 첫머리에서 통독은 우연이었는가,필연이었는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독일통일을 우연으로 보는 것은 이미 필연적으로 예정된 통일을성사시키는데 콜.고르바초프.디트리히 겐셔.조지 부시같은 당대 지도자들이 역사만들기의 설계를 갖고 주체적인 역할을 할 여지가없다고 보는 헤겔류의 역사해석이다.
반면에 역사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인간은 단순히 익명의 플레이어가 아니라는 카를 포퍼의 입장에 서면 아데나워.브란트.콜.
고르바초프.부시와 프랑수아 미테랑은 말할 것도 없고 89년 여름 동독피난민들에게 서독으로 넘어갈 길을 열어준 동유럽국가 지도자들이 모두 독일통일의 역사적 사건의 주인공들이다.통독의 과정을 보면 우연적이라고 생각할만한 요소가 많다.고르바초프 아닌사람-브레즈네프나 안드로포프가 소련공산당 서기장자리에 있었다면.동독에 호네커를 대신할 비전있는 지도자가 있었다면.소련 정치국의 보수세력이 89년 당시 동구사태의 심각성을 간파하고 「벨베트 혁명」을 초기에 진압했다면….
헤겔에게 있어 필연적이라고 하는 것은 기계적인 결정론이 아니다.크게는 외곽에 산재(散在)하는 우연까지 필연의 일부다.콜과고르바초프가 「그때 그자리에서」 20세기 최후의 역사를 연출한것도 마상(馬上)의 나폴레옹이 프랑스혁명의 이 념을 유럽대륙에전파한 이성적인 행동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의미가 된다.
콜의 안보보좌관 호르스트 텔칙이 통독과정을 상세히 기록한 『3백29일』을 봐도 독일통일에는 국운(國運)같은게 따랐다는 시샘하는 마음이 생긴다.콜의 독일인 특유의 냉철한 판단력과 추진능력,그리고 통독에 이해관계를 가진 많은 나라 지 도자들과 평소에 다져둔 개인적인 친분이 없었던들 독일국민이 그런 행운을 잡았을까.
콜은 89년 11월9일 베를린장벽 붕괴의 급보를 폴란드방문중에 받았다.그러나 그는 수행원들에게 「통일」이라는 말을 일절 입밖에 내지 못하게 하고 베를린에서 열리는 군중대회에 참석하기위해 하룻동안 일시귀국하고는 다시 폴란드방문 일 정을 계속하는여유를 보였다.
콜은 통치능력을 잃은 동독지도부와 통화.경제.사회통합의 협상을 벌이면서 90년 3월 자유롭고 민주적인 방식의 동독의회선거를 실시할 준비를 했다.동독의회선거에서는 콜의 기독교민주당과 제휴한 동독기독교민주당이 압승했다.그리고 서독기본 법 23조에따라 동독 5개주가 서독에 편입되는 절차를 밟았다.
그러나 밖으로는 걸림돌이 많았다.콜은 통독이 유럽통합의 큰 틀안에서 진행될 것임을 강조했지만 프랑스의 미테랑은 동독과 소련을 왕래하면서 독일통일 저지를 시도했다.콜은 그런 미테랑에게서 17세기의 30년전쟁(1618~48)중에 국가 이익 우선의「국가이성」의 외교로 독일통일을 적어도 2백년은 늦췄다는 드 리슐리외의 모습을 보았을 것 같다.대처 영국총리도 반대했다.
가장 어려운 문제는 소련군이 동독에서 철수하고 통일된 독일이북대서양조약기구(NATO)회원국으로 남는 문제였다.고르바초프와콜은 우여곡절끝에 고르바초프의 고향인 카프카스에서 「2+4」협정의 원칙과 독일군 규모 37만명에 합의 했다 .
자서전은 주관적이다.그래서 객관성이 떨어진다.그래도 콜의 자서전은 독일이 막강한 경제력만으로 통일을 매수(買受)했다고 생각하고 싶은 한국인들의 유혹에 찬물을 끼얹기에 충분하다.콜은 흥분과 감정을 자제하면서 낟알의 구슬처럼 굴러다니 는 우연을 필연의 줄에 꿰어 비스마르크 이래의 위업을 달성했다.깜빡 번지수를 잊고 그의 지성과 통찰력을 갖춘 「한국의 콜」이 기다려지는구나. (국제문제대기자) 金永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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