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년 北核위기때 訪北 카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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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94년 상반기는 북핵(北核)문제로 한반도 긴장이 최고조에 달했던 시기다.미국은 유엔안보리를 통해 국제적 압력을 가하는등 북한의 목을 죄어 갔고 북한 핵시설에 대한 폭격론까지 제기됐다.북한은 이에맞서 전쟁불사를 외쳤고 또다른 직접 당사자인 한국도 북한의 군사움직임을 시시각각 체크하면서 만일의 사태에 대비했다.그랬던 만큼 94년 6월 지미 카터 전미국대통평의 평양 방문은 세계인의 주목을 받았다.
당시 카터는 북핵문제가 파국으로 치닫자 1차적 원인이 김일성(金日成)과의 커뮤니케이션 부족때문이라고 믿었다.6월5일 빌 클린턴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 방북(訪北)필요성을 설명했다.클린턴은 구체적인 상황브리핑을 위해 보좌관을 보냈다 .
6월12일 카터는 부인.보좌관,그리고 통역인 국무부 딕 크리스텐슨(현재 주한 미대사관 부대사겸 공사)과 함께 서울로 왔다.다음날 카터는 김영삼(金泳三)대통령을 만났다.
카터는 6월15일 판문점을 거쳐 평양에 도착,김영남 부총리겸외교부장을 만났다.카터는 이날 저녁 북한에 대한 국제 제재위협이 북한측에 아무런 효과를 가져올 수 없으며 국제압력에 굴복하기보다 전쟁을 택할 것으로 인식했다.카터는 다음 날 자신이 제3차 북.미고위급 회담을 제안할 수 있도록 조치해 달라는 메시지를 백악관에 보냈다.6월16일.카터는 김일성과 만났다.카터는먼저 그의 비공식적 역할,그리고 金대통령과의 면담내용도 소개했다.김일성은 이 자리에서 평양의 경 수로 기술획득에 대한 미국의 지원등을 요구하면서 모든 핵문제가 북.미 3단계 회담에서 해결될 것으로 언명했다.김일성은 또 북한이 핵개발 프로그램을 동결할 수 있으며 구형 원자로가 안전하게 교체된다고 밝혔다.카터는 이날 저녁 워싱턴으 로 갈루치에게 직접 전화를 걸었고 당시 클린턴 대통령과 주요 정책결정자들은 통화내용을 스피커폰으로동시에 들었다.
6월17일 카터는 평양에서 클린턴 행정부가 유엔제재를 연기할의사가 있음을 발표했으며 뒤이어 대동강의 김일성 전용요트에서 3시간30분 동안 회담을 가졌다.이 회담에서 카터는 워싱턴이 북한이 요구한 경수로 문제를 북.미 3단계 회담 에서 논의하는데 「전적으로 동의」했음을 김일성에게 통보했다.6월18일 카터는 김영삼 대통령에게 보내는 김일성의 메시지를 갖고 남쪽으로 내려왔다.金대통령이 『언제,어디서든,조건없이 빠른 시일안에 만나고 싶다』는 金주석의 제의를 수락함 으로써 남북 정상회담이 성사되게 됐다.이로써 북핵문제로 야기된 한반도 긴장도 해소됐다.이후 남북 고위실무접촉에서 7월25일 평양에서 정상회담을 갖기로 합의했으나 김일성이 7월8일 심장마비로 급사함으로써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은 무산됐 다.
김성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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