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적 무의미 '유러피언' 크게 늘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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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벨기에에 살고 있는 컴퓨터 엔지니어 데이비드 해밀턴씨의 직장은 런던 히드로 공항에 있다.
10월의 어느 수요일 오전 8시.그는 여느때처럼 런던행 사베나 항공편에 몸을 실었다.
브뤼셀 자벤탐 공항에서 히드로공항까지의 비행시간은 1시간 남짓.집이 바로 공항 근처라 1시간40분이면 사무실에 도착할수 있다. 서울은 물론 런던과 같은 웬만한 유럽 대도시 기준으로 봐도 출근까지 걸리는 시간이 그렇게 많은 것은 아니다.그의 국적은 영국.직장도 런던에 있다.하지만 그는 브뤼셀에서 산다.굳이 브뤼셀에 사는 이유로 그는 『벨기에 출신인 아내가 고향에서살고싶어 하기 때문』이라고 대답한다.
히드로공항내 컴퓨터망을 관리중인 그는 1주일에 3~4번 정도출근한다.때문에 특별히 이사할 생각이 없다.이렇게 영국~벨기에간 국경을 넘나들며 출퇴근하는 그의 생활은 6개월이 넘었다.
엄청난 항공료를 어떻게 감당하느냐는 질문에는 『 저렴한 1개월짜리 정기권이 있어 큰 부담은 되지 않는다』는 대답이다.
아침은 브뤼셀,점심은 런던,그리고 저녁은 또다시 브뤼셀에서 먹는 해밀턴씨에게 영국과 벨기에가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
아마도 우리로 치면 경기도와 충청도의 차이 정도에 불과할지도모른다.유럽에는 요즘 이와같은 「유러피언」들이 많다.
민족국가라는 좁은 굴레로부터 해방돼 유럽 전체차원에서 호흡하고 생활하는 사람들이라는 의미다.
영국 뉴캐슬대학 정치학과 라인하트 드리프트 교수도 그중의 하나다.완벽한 영국식 발음에다 전형적인 영국신사로 보이는 그는 알고보니 독일인이었다.그러나 그는 자신을 『영국인도 독일인도 아닌 유러피언』이라고 정의한뒤 『과거 독일여권을 소지했었으나 지난해 유럽단일여권이 나와 바꿨다』고 답한다.
영국인 아내와 함께 뉴캐슬에 보금자리를 마련한 드리프트교수는고향인 독일은 물론 오스트리아및 스위스에도 가까운 친척이 살고있다.현재는 영국에 몸담고 있으나 그는 어느때라도 다른 유럽국가로 갈 준비가 돼있다.
자연히 그에게 있어서는 영국.독일뿐 아니라 유럽 전체의 흥망성쇠가 지대한 관심사이며 자신의 운명과 연관된 일일 수밖에 없다. 지난 93년 인적.물적자원및 정보의 자유로운 유통을 보장하는 유럽단일시장 출범 이후,이처럼 자신의 존재(Identity)를 유러피언으로 규정하는 젊은이들이 크게 늘고 있다.궁극적으로 「유럽합중국」건설을 지향하는 유럽연합(EU)역시 문화및교육교류를 통한 유러피언 양성에 힘쓰고 있다.외국어를 배우려는젊은 학생들을 해당국가로 보내 교육시키는 링구스 프로젝트,외국대학간의 학생교환제도인 에라스무스 계획등 일일이 열거키 어려울정도다.EU가 운영하는 유러뉴스는 유 럽 소식을 12개국 언어로 번역,온종일 내보내고 있다.
게다가 눈부신 정보통신 혁명과 운송산업의 발전은 명실상부한 「무국경의 유럽사회」를 가져왔다.
유럽전체의 소식을 보도하는 유러피언지가 영국에서 발간되고 있으며 벨기에의 경우 원하면 이나라 것이 아닌 유럽 고유의 번호판을 차에 부착토록 허용하고 있다.유럽사회의 전체적인 발전방향은 거스르기 어려운 도도한 흐름으로 유럽통합을 지 향하고 있어유러피언의 머리와 가슴을 지닌 이들이 불어날게 분명하다.
런던=남정호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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