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웨덴에서 한국인답게 행동하기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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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SUNDAY

스웨덴이 낳은 유명 브랜드 ‘이케아’숍의 쇼핑 가방

서유럽에 비해 상대적으로 비주류 여행지인 스웨덴에서 숙소를 찾기란 쉽지 않았다. 우리는 간신히 스웨덴인이 운영하는 한국 민박집을 찾을 수 있었고, 스웨덴 가정의 분위기를 엿볼 수 있는 기회라 내심 기대가 컸다. 그러나 목소리조차 ‘쉬쉬’ 해야 하는 극도의 적막함은 숨이 막힐 듯했다.

내가 남편에게 꺼질 듯한 목소리로 “영락없는 감옥 신세네” 하면 “그러다 주인이 듣겠어. 좀 조용히 말해”라고 답할 정도. 집안 구석구석에 붙은 포스트잇에는 민박 지침들이 쓰여 있었는데 ‘욕실을 쓸 때는 물 한 방울도 남김없이’ ‘11시 이전엔 취침’ ‘문 닫을 때는 살살’ 등 주로 통제에 관한 경고였다. 아침이 밝자마자 육중한 수갑을 던져버리듯 민박집을 빠져나와 스톡홀름으로 향했다.

그런데 이게 뭔가. 코펜하겐과는 달라도 너무 다른 풍경. 지하철에는 그 흔한 무인발매기 하나 없이 수많은 사람이 표를 사기 위해 길게 늘어서 있고, 사람들의 무채색 옷차림은 거무죽죽하기 이를 데 없다.

세계인의 일상을 파고든 H&M과 이케아(IKEA)의 나라라고 하기엔 너무도 검소해 가난하게조차 보이는 풍경. 사브와 볼보라는 근사한 자동차 브랜드를 가진 나라라는 계산까지 더해지면 뭔가 짝이 맞지 않는 듯했다. 우리는 속물스럽게도 이렇게 반문할 수밖에 없었다. “이 사람들이 그렇게 잘사는 사람들이란 말이야?”

우리가 민박집으로 돌아왔을 때 스웨덴 주인 아저씨는 집을 비운 상태였다. 나는 이때다 싶어 거실에서 인터넷을 하고 있는 한 청년에게 비밀요원처럼 말을 걸었다. “한국 분 맞죠?” 스웨덴 민박집에선 결코 원하지 않았을 ‘한국인 담합대회’는 이렇게 건넨 말 한마디로 시작됐다.

런던 금융회사 인턴십 중인 유학생, 노르웨이를 여행 중인 회사원, 예비 사회 선생님, 그리고 스웨덴 디자인 유학생, 여기에 우리 부부까지. 둘 이상 모이면 꼭 술판을 벌이는 한국인답게 우리는 각자 가져온 술(역시 한국인 인심은 세계 최고!)과 안주를 풀어놓고 주거니 받거니 하며 그동안 참아 두었던 이야기를 경쟁적으로 나누었다. 집에 돌아온 스웨덴 주인 아저씨는 난감한 이 상황에 안절부절못하고 우리 주위를 어슬렁거렸지만 그 누구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갑자기 왜 이렇게 대범해졌느냐고? 그것은 바로 소심한 트리플 A형도 춤추게 한다는 위대한 알코올의 힘 때문이다!

그러나 알코올의 힘은 언제나 그렇듯 아침이면 맥을 못 춘다. 전날 밤 별의별 이야기를 다 늘어놓던 한국인 일행은 아침이 되자 언제 그랬느냐는 듯 수줍어하며 목인사만 겨우 주고받는다. 나 역시 사정은 마찬가지. 자신 없는 목소리로 “여보야, 어제 나 좀 취했지?” 탐탁지 않은 목소리로 이어지는 남편의 응수. “응. 아주 신나 죽더라!”

스웨덴에 가면 남편과 내가 꼭 보고 싶은 것이 있었다. 커다란 생선을 가시만 남겨놓고 한번에 발라 먹는, 아슬아슬한 외줄타기를 껌 씹듯 즐기곤 했던 추억 속의 삐삐롱스타킹. 스웨덴의 국민작가로 칭송받는 린드그렌의 대표작 ‘삐삐롱스타킹’과 다른 작품들을 기리기 위해 린드그렌 마을을 조성해 놓았다니 꼭 들러 봐야지.

우리는 노르웨이 일정도 미루고 스톡홀롬에서 한참 떨어진 ‘삐삐롱스타킹’ 마을로 떠나기로 했다. 스톡홀름에서 4시간 걸려 도착한 한적한 마을. 이 허허벌판에서 과연 그곳을 찾을 수 있을까? 나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남편을 쳐다봤다. 요즘 나는 벽에 부딪칠 때마다 한 마리 나약한 비둘기가 되고 만다. 결혼 전의 위풍당당한 패기와 도전정신은 어디로 사라졌단 말인가.

부부 is 술주정한 다음날, 보기 가장 무서운 얼굴이면서 동시에 가장 기대고 싶은 가슴.

아임, 이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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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저히 자기중심적인 아내 아임(I’m)과 완전 소심하고 꼼꼼한 남편 이미리(2㎜)씨. 너무 다른 성격의 서른 셋, 서른 네 살 부부가 연재하는 ‘좌충우돌 부부 유럽 여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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