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소설>달아 높이곰 돋아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3면

『스케치하다 해변에서 만났지요.그후 줄곧 나를 북돋워 주었습니다.한국사에 대한 긍지를 심어 준 것도 그분이고,한국여성의 강인하고 슬기로운 역사적 특질에 눈뜨게 해 준 것도 그분이었습니다.또 보스턴서 공부할 수 있었던 것도 켄트교수 덕입니다.』『보스턴에서? 그럼 켄트교수를 만났겠네요?』 을희는 죄는 가슴으로 물었다.
『네.』 고교수의 이마에 그늘이 지는 듯했다.
『그분이 헬리콥터 추락 사고로 구사일생하신 일은 아시지요? 요즘도 휠 체어에 의지하고 계시지만 꾸준히 연구생활을 하고 지내십니다.영어사만이 아니라 한.일 비교언어사에 관한 연구지요.
아주 재미있는 새 분야예요.』 『건강하십니까?』 『네.비교적….』 『아무도 안 만나신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집요한 질문에고교수는 의아한 눈초리로 을희를 건너다보았다.
『켄트교수를 잘 아시는 모양이군요.』 『실은 제가 복학하게 된 것은 켄트교수님 덕이었어요.』 남편과 이혼하여 출판사를 차린 일등 짤막하게 자초지종을 밝히고,첫권으로 소서노여대왕에 대한 고교수 책을 내고자 한다며 청탁을 곁들였다.
『내 연구의 「정상」이 바로 소서노여대왕인 걸 어떻게 알았나좀 놀랐지요.그래서 사장이라는 여자가 어떻게 생겼나 궁금해서 오시라 한 겁니다.결례이긴 했지만 결과적으로 참 반가운 해후가된 셈이군요.』 고교수는 스스로 을희와의 만남에 가치를 얹고는집필을 약속했다.
『용케 응낙을 받아내셨습니다.』 구실장은 좋아하면서도 석연치않은 말투로 토를 달았다.
『잘 아시는 분이었습니까?』 『내가 학교다닐 때 조교였지요.
「고호」라는 별명으로만 통했었기 때문에 그분이 고일호교수인 줄은 까맣게 몰랐어요.』 을희는 쾌활하게 받아넘겼다.
한달만에 원고가 왔다.너무나 빠른 당도에 오히려 당황했다.여행가방에 가득히 원고를 담아 손수 들고 출판사로 찾아온 고교수는 쓴웃음을 지으며 소파에 털썩 앉았다.
『솔직히 고백하면 원고는 이미 써놨던 겁니다.어느 출판사서 낼까 궁리중이었는데 마침 아사달에서 의뢰가 와 내심 반가웠지요.그동안 되읽고 다시 손질했어요.』 그는 연거푸 담배를 피웠다.좁은 편집실은 담배 연기로 매캐했다.을희가 기침하자 구실장이못마땅하다는듯 한마디 했다.
『연기 무게가 상당할 것같습니다.
담배 연기의 무게를 재는 법,아십니까?』 글 이영희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