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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안대교를 뒤덮은 사람 물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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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출발 신호와 함께 우렁찬 축포가 터졌다. 제법 의젓한 어린이 취타대를 앞세우고 3만 명의 거대한 행렬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벡스코(부산전시컨벤션센터) 앞에서 길은 급격하게 꺾이며 좁아졌다. 드디어 광안대교로 접어드는 것이다. 거대한 교량은 물이 차오르듯 사람들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벡스코 앞에서 광안대교 주탑까지 약 3㎞가 삽시간에 사람들의 물결로 넘실댔다. 구불구불한 행렬은 끝간 데 없이 이어졌다.

장관이었다. 어떤 영화에서도 볼 수 없는 스펙터클이었다. 영화의 군중 신이 엑스트라로 채워진다면, 이 장면은 3만 명 하나하나가 주인공이었다. 젊은 부부는 아이를 유모차에 태우고, 어깨 위에 무동을 태웠다. 아파트 부녀회에서 함께 나온 아주머니·할머니들은 주전부리를 하면서 얘기꽃을 피웠다. 아마추어 사진가들은 초승달처럼 휜 광안리 백사장과 지평선 위에 모습을 드러낸 대마도를 카메라에 담았다.

평화로웠다. 상대를 이겨야 하는 레이스가 아니기에 모두들 느긋했다. 시각장애인 곽혜진씨도 8년째 함께한 안내견 양지(9살)를 앞세우고 바닷바람을 즐겼다. “차들이 쌩쌩 달리는 이 다리를 언제 이렇게 편안하게 걸어보겠어요.” 그의 말이 가슴에 닿았다. 지난 일요일(9월 28일) 오전 부산에서 열린 세계 1000만 명 걷기대회를 수놓은 장면들이다.

광안리 앞바다를 가로지르는 총연장 7.42㎞의 광안대교는 웅장한 외양과 화려한 야경으로 국제도시 부산의 랜드마크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하지만 광안대교는 새해 해맞이와 마라톤 대회 등 1년에 두세 번만 일반에 개방할 뿐, 평소에는 걸어다니지 못하게 차단한다. 이번 걷기대회는 부산의 자랑 광안대교를 부산 시민에게 잠시나마 돌려준 시간이었다. 올해는 광안대교의 절반만 걷게 했는데 앞으로 전 코스를 돌아오는 국제걷기대회를 매년 개최하면 어떨까 싶다. 미국의 보스턴 마라톤 이상으로 세계적인 명물이 될 것 같다.

이번 걷기대회는 부산세계사회체육대회의 일환으로 열렸다. 대회를 주관한 세계사회체육연맹(TAFISA) 이상희 회장은 “중앙일보가 앞장선 걷기대회가 대성황을 이룬 덕분에 세계사회체육대회의 위상이 크게 올라갔다”며 고마워했다.

지난달 26일 개막한 세계사회체육대회는 1일 막을 내렸다. 102개국에서 온 3000여 명의 외국 선수를 포함해 7000여 명이 각국의 전통 스포츠·무예·춤·놀이를 시연하고, 감상하고, 배웠다. 지구 반대편에 이렇게 닮은 전통 스포츠와 놀이가 있다는 데 새삼 놀랐다. 사라져 가는 민속놀이인 줄로만 알았던 연싸움이 2년마다 올림픽(80개국 출전)이 열릴 정도로 뜨는 스포츠라는 사실도 처음 알았다. 피어젭펜(장대를 이용해 개울을 건너는 네덜란드 전통 스포츠)은 워낙 인기가 높아 이틀간 시민을 대상으로 강습회를 열 정도였다. 씨름-벨트레슬링은 두 종목이 힘을 합쳐 국제화를 이룰 수 있음을 확인했다. 아프리카 벨트레슬링 선수가 민속씨름에서 우승했고, 한국의 씨름 선수도 벨트레슬링 무제한급 챔피언에 올랐다.

이번 대회는 처음으로 국제올림픽위원회(IOC)가 승인했고, 30여 명의 IOC 위원이 참가했다. IOC와 유네스코가 ‘전통-민속 스포츠와 엘리트 스포츠가 함께 발전하도록 노력한다’는 부산 선언도 발표했다. 하지만 ‘생활체육 올림픽’에 대한 우리 정부의 인식은 뜨뜻미지근했다. 대통령·총리는 고사하고 문화체육관광부 장관도 개막식에 나타나지 않았다.

생활스포츠는 엘리트 스포츠의 뿌리다. 누구나 스포츠 활동에 참여할 수 있고, 언제 어디서든 즐길 수 있어야 선진국이다. 광안대교를 뒤덮은 인파는 생활스포츠가 우리 삶 속에 소리 없이, 강력하게 스며들고 있음을 보여준 상징이었다.

정영재 문화스포츠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