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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미래 세대를 위해 운동장을 밝혀주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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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추석을 늦은 여름에 맞이해 실종된 가을을 그리워했는데 며칠 사이 아침저녁으로 기온이 쌀쌀해졌다. 바깥 활동 하기가 좋은 가을이 온 것이다. 금요일 저녁 직장 일을 마무리하고 집에 들어온 나를 보고 아빠 오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막내아들이 나가 놀자고 떼를 쓴다. 등쌀에 못 이겨 농구공을 가지고 학교 운동장으로 갔다. 틈만 나면 컴퓨터 게임이나 만화에 몰두하는 것보다는 운동이 좋을 것 같아서 피곤한 몸이지만 선뜻 나섰다.

어둠이 깔린 저녁 8시 운동장에는 많은 사람들이 나와 조깅트랙을 돌고 있었다. 운동장 구석 농구장에서는 중·고등학생으로 보이는 사내아이들이 소리를 지르며 농구 경기를 하고 있었다. 얼굴 형체도 알아볼 수 없는 상황에서 농구가 가능한 것을 보니 신기해 보였다. 농구장 주변 표지판에는 주변 주택가 수면방해로 저녁 10시 이후에는 농구장 사용 금지라는 글이 적혀 있었다. 아이들은 근처 가로등 불빛에 의존하며 까만 농구공을 받아내고 있었다. 인간 신체의 적응 능력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극장에서의 경험이 떠올랐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다가 시간이 지나면 어느 정도 보이게 되는 것을 많은 사람들은 경험했으리라.

에너지가 넘치고 한참 자랄 나이인데 세계 최고 교육열을 가진 나라에서 태어나 공부하느라 고생이 많은 게 우리 청소년들이다. 잠시라도 땀을 흘리면서 농구 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오늘은 집에 들어가 샤워하고 푹 잘 수 있을 것 같아 보였다. 그러면서도 우리 청소년들을 이런 상황에서 운동할 수밖에 없게 한 어른들의 무신경과 무관심에 부끄러웠다. 전국 도시의 수많은 청소년 운동시설도 큰 차이가 없을 것 같다. 나는 노안이 온 내 안구 기능을 최대한 살리려고 노력하면서 아들 녀석과 잘 보이지도 않는 까만 농구공을 주고받았다. 하지만 다음 날 나는 야간 농구로 부서진 안경을 수리해야만 했다.

나는 잠시 요즘의 중·고등학교 청소년이 돼 보았다. 학교 수업을 마치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손바닥만해진 운동장과 비만 오면 실내 자습을 하는 체육시간을 생각해 보았다. 방과 후에는 야간 자율학습을 하거나 독서실이든 학원에 간다. 저녁에는 무엇을 할까. 한류 드라마 강국인 나라에서 드라마를 볼까. 베이징 올림픽 7위, 아시아 2위 체육 강국인 나라에서는 무슨 운동을 할까. 공용 운동공간도 운동시설도 턱없이 부족하다. 저녁에 운동을 하려 해도 조명시설도 없다.

주말에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자전거나 롤러블레이드를 탈 수 있는 공원도 많지 않다. 인근 하천 공원까지 자전거로 가려 해도 진입도로가 없다. 얼마 전 베이징 올림픽에서 선전하는 우리나라 탁구선수의 모습에 감동을 받고 탁구장에 가려 해도 탁구장 찾기가 어렵다. 조립식 탁구대를 둘 수 있는 공간도 공터도 별로 없다. 정보기술(IT) 강국인 나라에서 고해상도 디지털TV로 게임을 하든지, 보는 스포츠를 즐기는 것이 최선이다. 더군다나 여학생들은 무슨 운동을 할 수 있을지 생각이 떠오르지 않는다. 선수층 저변도 없는 ‘우생순’ 여자핸드볼 아줌마들의 올림픽에서의 감동은 어떻게 가능한 것이었을까. 키도 크고 체중이 늘었다는 우리 청소년 체력이 그전만 하지 못한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닐까. 건강한 신체에 건전한 정신이 깃든다고 배웠는데 이것은 수능고사용 지식이다. 유학 시절의 미국 도시 어디를 가나 조명시설 있는 공용 농구장이나 야구장을 볼 수 있었던 것이 새삼스럽게 부러워진다.

2008년 국가 예산이 256조원이라고 한다. 지방정부의 예산도 만만치 않으리라. 국토를 개조하는 수많은 국책사업에도, 미래의 성장동력 산업에도, 교통체증을 해소하는 고속도로 건설에도, 그린벨트 풀어 주택 짓는 곳에도 사용해야 한다. 국민소득도 빨리 3만 달러를 달성해야 한다. 쓸 곳이 천지이니 350만 명의 중·고등학생들이 뛰어놀 수 있는 운동장 조명시설에 쓸 돈이 있을까.

투표권 없는 미래 세대의 아우성이 들린다. 사람에 대한 투자가 제일이다. 기술이 발전해 에너지를 절반 소모하면서도 오히려 두 배 밝은 가로등도 가능하다고 하니 더군다나 못할 것도 없다.

미래 세대들의 삶의 질이 개선되고 행복이 증진되는 작은 투자에도 정부는 관심을 가져야 할 때다. 이번 겨울에도 예산이 남아돌아 온전한 보도블록을 교체하지 않을지 걱정이 앞선다.

윤제용 서울대 교수·화학생물공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