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중앙시평

우리는 과연 주인 의식을 갖고 있는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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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북한의 긴급사태는 한반도 평화에 상당한 위험이 될 수 있고 남북관계도 고려해야 되기 때문에 조심스러운 주제다. 그러나 이런 문제를 대하는 우리의 자세에 짚고 넘어갈 점이 있는 것 같다.

주지하다시피 최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건강문제가 언론에 보도되면서 많은 사람이 한반도의 미래에 대해 불안감을 느끼고 있다. 특히 북한에 긴급사태가 생길 경우 중국이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이냐를 놓고 의견이 분분하고 우려도 많다. 최근 2∼3년 전부터 그러한 걱정의 목소리들이 자주 들려왔다.

그래서 한번은 베이징을 방문하는 길에 중국 외교에 대한 최고 권위자들 몇 사람을 만나 그들의 의견을 조심스레 살펴본 적이 있었다. 중국 내부에도 다양한 견해들이 있지만 대체로 그들의 반응은 합리적이고 신중한 것이었다.

그들은 북한의 2006년 미사일 발사와 핵실험으로 북·중 관계가 미묘해진 건 사실이지만, 북한이 중국의 전통적 우방으로 아직도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한·중 관계가 수교 이후 얼마나 깊어졌는지를 언급했고, 무슨 일이 생기면 한국을 포함한 관련 당사국들과 먼저 협의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반응들이었다. 어떤 전문가는 한·중 간에는 항공편이 1주일에 800편이 뜨는데 북·중 간에는 5편밖에 뜨지 않는다는 의미심장한 말을 하기도 했다.

내가 만난 미국의 전문가들도 대부분 한반도 미래에 대한 한국의 태도와 입장이 무엇이냐가 미국의 정책에서 중요하다고 말한다. 미국은 한반도 긴급사태 시 한국의 반응이 무엇인가를 먼저 보고 그에 맞추어 대응할 것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외국의 반응들을 접하면서 마음속에 씁쓸한 느낌을 금할 수가 없었다. 지금 밖에서는 한국을 주목하고 한국이 어떻게 해 나가느냐가 가장 중요한 고려사항이라고들 말하면서 궁금해하고 있다. 그런데 정작 우리는 우리 입장을 국민적 합의 위에 튼튼히 세우고 그것을 국제적으로 설득해 나갈지를 궁리하기보다는, 이 나라가 이렇게 하면 어떡하나 저 나라가 저렇게 하면 어떡하나 걱정만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한반도의 미래를 주도해 나갈 주인의식을 갖고 전략과 전술을 준비하면서 주변국과의 관계를 다져나갈 생각은 안 하고, 고래싸움에 등 터지는 새우라는 막연한 강대국 권력정치론의 함정에 빠져 우리 문제에 손님처럼 임하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물론 한국은 주변국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작은 나라다. 그러나 1세기 전 일본에 먹히거나 반세기 전 전쟁을 치르고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던 주변부 후진국은 더 이상 아니다. 세계에서 경제규모 12위를 차지한다고 스스로 자랑하는 우리들이다. 그런데도 혹시 우리의 의식은 1세기나 반세기 전과 별다름 없이 당하기만 하는 나라라는 피해 의식에 잡혀 있는 것은 아닌가 걱정된다. 그렇다면 정말 우리에게 미래는 없을 것이다.

스스로의 힘을 과대평가해 무엇이든 마음먹은 대로 다할 수 있다는 환상은 위험하다. 신중치 못한 외교적 판단을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 못지않게 위험한 것은 우리는 작은 나라이니 강대국에 끌려갈 수밖에 없다는 자포자기의 의식이다.

중국은 우리의 전략적 협력파트너 국가다. 중국 정부가 한국을 얼마나 중요시하는지 보여주기 위해 ‘전략적’이라는 말을 붙이자고 먼저 제안했다고 최근 중국의 어느 외교전문가는 말했다. 그들은 우리와 국제정치 전반에 협력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이다. 중국은 또한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한반도의 평화적 통일을 지지한다고 공언해왔다. 그러한 입장은 대만문제를 염두에 둔 중국의 정책과도 일맥상통한다.

이런 점들을 고려할 때 한국 국민들의 의지에 반해서 중국이 한반도에 대해 어떤 과격한 조치를 취한다면 그것은 그들에게 커다란 외교적 모험이 될 것이다. 특히 한국의 동맹인 미국의 입장에 정면 도전하는 것이 될 때는 더욱 그러할 것이고 득보다 실이 많을 것이다.

물론 중국도 한반도에서 자국의 이해가 반영되는 것을 원할 것이다. 그리고 중국의 이해를 반영하면서 한국 국민들과 동맹국 미국의 희망들을 동시에 실현할 수 있는 외교적 가능성이 충분히 모색될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은 그러한 방법들이 무엇일지 조용히 연구하고 전략·전술을 짜내는 데 노력해야 할 때다. 결국 우리가 경계해야 할 가장 큰 적(敵)은 바로 우리 스스로의 패배의식일 것이다.

윤영관 서울대 교수·국제정치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