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와함께>시나리오4권 책으로 펴낸 극작가 김상수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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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튼튼한 집을 지으려면 기초가 충실해야 하듯 단단한 영화를 만들려면 시나리오가 좋아야 한다.영화가 영상예술의 극치라지만 받침대인 이야기가 부실하면 시시할 수밖에 없다.
최근 출판계에 작은 이변이 일어났다.좀처럼 팔리지 않을 것이라고 누구나 생각했던 시나리오 책이 인기를 얻고 있다.극작가 김상수(金相秀.38)씨의 『새야 새야 파랑새야』와 『학생부군신위』가 발간 한달만에 초판 1천부가 모두 팔린 것 .그가 여세를 몰아 『너무 늙은 빨래』와 『남방한계선』(모두 박영률출판사刊)을 내놓았다.네온사인 디자이너.매춘부등이 등장하는 『너무…』가 무기력한 소시민의 일상을 그렸다면 『남방…』은 탈영병을 소재로 분단현실에서의 병역문제를 거론한 다.또 『너무…』는 대화가,『남방…』은 이미지가 중심을 이룬다.그의 『안개기둥』이 86년 대종상 작품상(박철수감독)을,『학생부군신위』가 올해 대종상 각본상을 수상한 점을 감안하면 작품성은 일단 인정받은 셈이다. 『영화는 이미지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를 이미지로 표현하는 예술입니다.우리 영화의 고질병은 좋은 이야기가 부족하다는 점이에요.』 金씨는 나아가 1년내에 모두 25편의 시나리오를 탈고하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세워놓고 있다.이달말에 우선 5편이 나온다.군사정권 시대의 폭력,신도시 아파트단지,병에 걸린 권투선수,길에 버려진 노파,관중이 운집한 야구장,직장인의 애환 을 달래주는 소주,베이징(北京)한국대사관에 늘어선 중국동포들등 우리 현대사의 갖은 일상을 때로는 사실적으로,때로는 상징적으로 드러낼 작정이다.일관된 주제는 우리 이야기를 쓴다는 점.그래서 그는 우리 영화계에 대해 비판적이다.
『영화도 따지고 보면 정신적 작업입니다.과거와 현재를 직시하는 눈을 길러야 해요.그런데 영화인들이 흥행에만 매달리다보니 영화는 오락산업,저급한 장르라는 오해를 낳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고급영화만 주창하지 않았다.일례로 포르노 전용관도 빨리 열어야 한다고 말한다.그래야만 어중간한 에로물,혹은 덜익은 작품들을 막는다는 것이다.
『전국민이 잡민화(雜民化)하는 느낌입니다.우리의 색깔이 없어요.이것이 한국영화다라고 내보일 작품이 얼마나 됩니까.』 이같은 金씨의 시각에는 독특한 인생역정도 작용했다.공식학력은 고졸.처음에는 연극쪽에 뛰어들었다.「인생의 축소판」인 연극에 끌려10대 후반부터 무대 주위를 맴돌았고,우리 얘기를 하겠다는 일념에서 모두 9편의 창작극을 연출했다.또 미술에 눈을 돌려 지난해 파리에서 개인 설치미술전을 가졌으며,최근엔 24일부터 열리는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전인 무대미술가 윤정섭전의 기획도 책임졌다.94년에는 소설도 한편 썼다.
『정력 분산이 아니냐』는 질문에 『장르는 달라도 길은 통한다』며 『남방한계선』의 영화화가 현재의 숙제라고 말했다.그것도 스스로 메가폰을 잡으면서.자금확보와 캐스팅이 또다른 고민이다.
박정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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