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의눈>미국의 오만과 편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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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미국이 우리나라를 통신분야 우선협상대상국(PFC)으로 지정했다. 미무역대표부(USTR)는 『1년이라는 협상기한을 채우지 않을 것이며 필요한 모든 제재수단을 강구해나갈 방침』이라는 사뭇 협박조의 언사도 빼놓지 않았다.필요한 모든 수 단에 전가(傳家)의 보도(寶刀)격인 「보복관세」가 포함돼 있음은 물론이다.벌써부터 자동차와 반도체가 그 대상으로 들먹거려지고 있다.
미국이 이런 유(類)의 행동을 취할 때 늘 써먹는 논리가 이른바 「공정무역(fair trade)」이다.이번에도 미국은 『한국정부가 민간통신업자들의 장비 구매과정에 부당하게 개입,미국기업들의 한국시장 참여를 막고 있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한국정부가 민간업자들의 구매과정에 관여치 않을 것이라는 보증을 문서로 남기라』는게 그들의 요구다.
『민간기업의 활동에 정부가 관여할 수도,관여해서도 안된다』는우리정부의 거듭된 입장표명은 한국 정부가 관여하고 있음이 분명하다는 미국의 「심증」 앞에서는 한낱 무력한 소리일 뿐이다.
그렇다면 「문서에 의한 정부보증」이란 황당한 요구를 해올 만큼 그들이 중요시하는 「정부관여 배제」는 미국의 확고한 원칙일까. 지금 미국은 이달말로 만료되는 미.일 반도체협정의 경신을위한 협상을 벌이고 있다.기존 미.일반도체협정의 골자는 일본 반도체시장의 일정 몫-협정상 20%이나 현재 실제로는 30%에이르고 있음-이상을 의무적으로 외국산 제품에 내줘 야 한다는 다분히 주권침해적인 내용이다.미국의 압력에 밀려 이런 협정을 받아들였던 일본이 이번 만큼은 협정의 폐기,또는 민간기업차원에서의 협조로 바꿔야 한다고 나선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미국은 미.일 민간기업간의 협조정도로는 그들이 현재 누리고 있는 시장점유율을 지킬 수 없다며 집요하게,사실상의 정부관여와 수치목표를 포함한 협정체결을 요구하고 있다.
한국 민간통신업체의 장비구입에는 정부가 관여하지 말라고 요구하면서 일본 민간기업의 반도체 구매에 대해서는 정부가 나서서 보장해줘야 한다는 식의 이율배반(二律背反)적인 논리가 지척에 있는 두나라에서 아무 스스럼없이 동시에 ■이고 있 는 것이다.
미 농무부는 해마다 내는 외국의 무역장벽에 대한 보고서에서 아프리카의 소국 코트디부아르에 대해 「외환부족이 중요한 무역장벽」이며 「불어(佛語)상표를 부착토록 한 것이 스낵류 수출에 대한 장애」라고 지적한 바 있다.물건 살 돈이 없 고 불어권 국가가 불어상표를 쓰는 것조차 「무역장벽」으로 간주할 정도니 외환걱정이 없는 나라의 거대한 시장을 미국제품이 원하는만큼 차지하지 못하는 것은 그 이유가 뭐가 됐든 엄청난 「무역장벽」으로 보일 것이야 두말할 나위도 없다.
미국이 말끝마다 남들의 부당함을 지적하며 내세우는 「공정(fair)」이란 말의 사전적 의미는 정당하고(just),정직하며(honest),공평하고 (impartial),편견이 없다(unprejudiced)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미국의 행동은 어느 모로 봐도 정당하지도,정직하지도,불편부당하지도 않다.오직 타국에 대한 편견과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으로서의 오만함 만이 보일 뿐이다.
이러한 편견과 오만은 미국의 대(對)쿠바및 이란-리비아제재법에서 더욱 뚜렷이 나타난다.미국은 쿠바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촉진하고,테러국가로 낙인찍은 이란과 리비아에 대한 자금줄을 봉쇄하기 위한 「국제적 협조」를 명분으로 내세우고 있 지만 그 내용은 자신의 대외정책적 목표를 다른 나라에 강요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어떠한 명분을 동원하든 한 나라가 자국의 입맛에 맞춰 법을 만들어 놓고 다른 나라에서 이를 어기면 그 법에 따라 제재하겠다고 나서는 것이 정당화될 수는 없다.
(국제경제팀장) 박태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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