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달산 영혼과 바다를 껴안고 국민 애창가요 ‘목포의 눈물’은 별과 보름달과 함께 옷자락을 흔들며 운다. 이른 가을바람에 묻어나는 풀 냄새. 무더위를 이겨 낸 과일들이 ‘강강술래 강강술래’를 부르며 삼학도를 껴안고 돌아간다. “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며/ 삼학도 파도 깊이 스며드는데/ 부두에 새악씨 아롱 젖은 옷자락/ 이별의 눈물인가 목포의 서름/ 삼백 년 원한 품은 노적봉 밑에/ 임 자취 완연하다 애달픈 정조/ 유달산 바람은 영산강을 아느니/ 임 그려 우는 마음 목포의 눈물.” 유달산·삼학도·노적봉·영산강을 안고 도는 사랑가, 진혼가, 이별가는 1935년에 발표됐다.
유달산(228m)은 노령산맥의 마지막 봉우리로 다도해로 이어지는 서남단의 땅 끝 산. 사공은 어디 가고 뱃고동만 크고 작은 섬들을 맴돈다. 유달산 산행의 첫머리는 노적봉. 산봉우리를 이엉으로 덮고 군량미를 쌓아 큰 노적으로 보이게 해 진도의 강강술래, 영산강 횟가루, 울돌목 쇠줄과 함께 이순신 장군의 위장전술이 민요가 되고 민속이 되어 전한다. ‘목포의 눈물’ 노래비는 유달산 중턱 화강암 반석에 자리를 틀고 앉았다. 삼학도를 비롯한 목포 시가지가 한눈에 들고 ‘사의 찬미’를 부른 윤심덕과 대한해협에 몸을 던진 희곡작가 김우진은 목포문학관에 박화성·차범석과 함께 있다. 이난영의 본명은 이옥순. 4학년까지 다닌 북교초등학교가 유달산 곁에 있고 고래바위·종바위·투구바위 등 유달산의 바위들은 투구꽃처럼 기묘한 아름다움으로 삼학도를 어루만진다.
목포시 양동에서 태어난 이난영은 열여섯 살 꽃 같은 나이에 ‘목포의 눈물’로 조선을 눈물의 바다, 눈물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음반 취입 당시 ‘삼백연(三栢淵) 원안풍(願安風)’은 검열을 벗어나고자 쓰였고 해방 이후 본래 노랫말을 되찾아 ‘삼백 년 원한 품은 노적봉 밑에’로 불린다. 이난영의 생가 터는 목포 양동교회 뒤편 주택가에 있다. 검은 대리석 원기둥에 세워진 이난영의 흉상은 살아 있는 옛 모습을 보듯 단정한 치마저고리 차림이다. 두 손을 마주 잡고 당시를 노래하듯 앳된 모습으로 윗저고리 옷고름을 날리며 서 있다. 작곡가 김해송과 결혼한 이난영은 한국전쟁 때 남편이 납북되는 비운을 겪는다. 김시스터즈 등 일곱 남매를 세계적인 가수로 키운 이난영은 자녀가 미국으로 떠난 뒤 서울에서 홀로 살다 49세로 이승을 떠난다. 파주 용미리 공동묘지에 안장됐던 유해는 2006년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삼학도에 묻혔다.
노래가 그리우면 목포로 가자. 물의 도시, 꽃의 도시, 섬의 도시, 예술의 도시인 목포. 이국의 베네치아 산타루치아역에서 내리듯 목포역에 내려 우리들 영혼도 쉬어 가자. 유달산, 고하도의 저녁노을, 효자가 울다 지쳐 울음이 바위가 된 갓바위, 다도해의 섬, 해넘이 목을 타는 노을 낙조의 아름다움, 유달산 낙조대로 가자. 목포항에서 떠나는 홍도·가거도·흑산도. 다도해가 세계의 섬으로, 목포항이 세계의 미항으로 우뚝 설 그날까지 고이 잠든 저 바다는 영원한 꿈나라로 세계의 여행객을 부르고 모을 것이다. 어머니의 바다처럼 어머니의 생명처럼 목포는 영원히 푸르고 영원한 어머니가 되어 우리를 부르고 있으리라.
‘목포역은, 어머니/ 삼학도, 학들이 모여 사는/ 목숨의 둥지인가, 목숨의 둥지인가/ 비피나무와 포포와 포미/ 목포역은, 바다와 섬으로 서있네/ 눈물로 서있네/ 어머니 애틋한 그리움/ 어머니 애틋한 그리움 같은/….(박해수 시 ‘목포역’ 중에서)
어머니의 젖가슴처럼 포근한 포옹의 바다 목포, 목포의 눈물은 눈물샘을 적시고 우리들 푸른 가슴속 깊고 깊은 푸른 침묵을 안고 유달산 도라지빛 물바람이 되어 삼학이 되어 새천년을 노래하고 노래 부르고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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