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달아 높이곰 돋아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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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그리고 함께 죽었다던 아이도 이렇게 멀쩡히 을희 앞에 앉아있다. 김대기(金大起).
언젠가 남편은 「빛날 혁(赫)」과 「일어날 기(起)」가 가장마음에 드는 한자라고 한 적이 있었다.
「혁(赫)」은 「불로 비춘 듯 분명히 나타남」을 뜻하는 글자요,「기(起)」는 「바닥에 있거나 눈에 띄지 않던 것이 일어남」을 가리키는 한자라 했다.
인생의 바닥살이를 겪어온 그는 불처럼 일어나 사회의 상층구조로 들어서려는 뜨거운 야망으로 뭉쳐 있었다.그것은 흡사 「앙심」과 같았다.
남편이 좋아하는 한자로 불리는 남편의 아이를 마주하며 을희는절망적인 소외감을 느꼈다.
『내년 봄엔 학교에 가야합니다.그 전에 입적시켜줘야 할 것같아서 이렇게 결례를 무릅쓰고 왔습니다.』 여인의 말투는 점잖고차분했으나 뜻을 이루고야 말겠다는 굳은 의지를 풍겼다.
배신감으로 으스러질 것만 같았다.
모두 거짓말이었다.피란 중에 모자(母子)가 죽었다는 것도,미군부대 군납업자라는 것도,셋방 살던 판잣집 안주인이 친척 누이라는 것도….
남편은 군납업자가 아니라 미군부대 허섭스레기를 싸게 넘겨 받아 도떼기시장에 내다파는 「불하업자」였다.
불하받는 물건 중에는 「1인용 담요 백」도 있었다.한사람이 들어가 잘 수 있도록 굵은 지퍼로 둘러져 있고 튼튼하며 푹신해서 불티나게 팔리는 인기 품목이었다.
그런데 그 불하가격이라는게 놀랄만큼이나 싸 공짜나 다름이 없었다.새 것과 같은 담요 백이 어째서 그처럼 싼 것인지 불가사의했다. 『딴 데 가서는 말하지마.』 궁금해하는 을희를 향해 남편은 싱글거리며 다짐받았다.
『이건 말야,미군 시체를 싸서 운반한 전사자 자루야.』 충격으로 을희는 한동안 입을 열지 못했다.그런 것도 모르고 사람들은 앞다투어 사서 둘러 자고 있는 것이다.「장사」의 기만의 무대 뒤를 본 듯 소름이 끼치며 남편이 저승사자처럼 보이기도 했다. 판잣집 안주인은 그 험한 장사의 거간꾼이었고 을희를 그에게 떠넘긴 장삿속 매파였다.
게다가 이 모자까지-.
떡두꺼비같은 아들을 낳아 자기가 좋아하는 글자로 이름지었으면서 왜 혼인신고는 물론 출생신고 조차 하지 않았는지,아이가 딸린 을희와 서둘러 결혼했는지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글 이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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