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희칼럼>올림픽정신과 파보 누르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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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8면

미국의 시사주간지 타임이 근대올림픽 1백주년을 맞는 시점에서사상 최고의 올림피안으로 핀란드의 철인 고 파보 누르미를 선정한 것은 역시 혜안이었다는 생각이 든다.타임지는 1896년 그리스 아테네에서 92년 바르셀로나에 이르기까지 모두 9만3천2백54명의 참가선수 가운데 올림픽에서의 성취도.도덕성.인격및 사회적 기여도 등을 평가기준으로 삼아 그 가운데 가장 위대한 올림피안 10명을 선정 발표했다.그 가운데는 80년대 육상단거리계를 석권한 칼 루이스,같은 시기 여자7종경기의 히로인 조이너 커시,베를린대회의 영웅 제시 오언스,호주의 수영왕 프레이저,체코의 장거리러너 자토페크,체조의 카슬라브스카등 우열을 가릴수 없을 만큼 찬연히 빛나는 올림픽스타들이 즐비하다.실로 올림픽 1백년의 세월은 엄청난 인물들을 배출한 위대한 기회의 광장이었음을 실감나게 해준다.
타임지가 누르미를 10걸 가운데서도 단연 돋보이는 최고의 올림피안으로 선정한데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물론 시각에 따라서는 전혀 다른 인물이 뽑혀도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을 정도로 기라성같은 인물의 보고(寶庫)가 거기 있기는하다.누르미는 20년의 앤트워프대회를 비롯,24년의 파리,28년의 암스테르담 올림픽을 넘나들면서 1천5백.5천.3천장애.1만.1만크로스컨트리를 휩쓸고 무려 9개의 금메달과 3개의 은메달을 조국 핀란드에 헌상한 희대의 중.장거리 영웅이었다.그러나누르미는 74년 77세로 타계할 때까지 사실은 올림픽에서 추방된 불운의 올림피안이었다.32년 LA올림픽 출전을 앞두고 미국원정에 나선 그는 이때 규정이상의 여비를 받았다는 이유로 아마추어규정 위반이라는 판정을 받고 올림픽에서 영구추방되는 가혹한징계를 받았다.당시 그가 얼마를 받았는지는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다만 아메리칸 인디언으로서 올림픽 5종및 10종경기 챔피언이었던 짐 소프가 야구 세미프로에서 1백20달러를 받고 뛴 것이 탄 로나 메달을 몰수당할 정도로 당시의 아마추어리즘은 청교도적인 엄격성과 결벽성이 있었다.스포츠가 상품이나 돈이 아니라정열과 노력으로 지탱돼온 감동의 시대가 있었던 것이다.단돈 몇푼에 금메달 9개의 영웅이 올림픽에서 추방되는 살얼음판 같은 제도아래에서도 사람들은 금기를 깬 사람을 오히려 나무랐던 시절이었다. 근대올림픽 1백년의 거의 대부분을 지탱해온 이 감동의역사는 상업주의 물결에 휩쓸리면서 손바닥을 뒤집듯 간단히 새로운 가치체계속으로 동화되었다.그러나 풍요를 구가하는 한편으로 퇴색해가는 정신의 초라함을 경계하는 눈길이 아직은 살아 있어 여간 마음 든든한 게 아니다.
올림픽 1백주년답게 애틀랜타 올림픽에는 1백97개 회원국이 모두 참가하고 조직위는 참가선수 전원에게 무료숙식을 제공한다.
17억달러(약1조3천6백만원) 예산에 3천3백만달러(2백64억원)의 흑자가 예상되는 이 대회와는 별도로 국제올 림픽위원회(IOC)는 2004,2008년의 여름,2006년의 겨울올림픽등아직 개최지가 확정되지도 않은 올림픽의 TV방송권료 23억달러(1조8천4백억원)를 미국 NBC방송과 계약하는등 돈이 지천으로 깔린 풍성한 분위기다.이러한 풍요 위에 누르미사건을 비춰보면 도무지 같은 세기의 일같지 않다.올림픽의 숭고한 이념이 풍요에 가려 퇴색될까 두렵다.
(KOC위원.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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