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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 이르는 술인데, 목이 칼칼해지네-‘라스베가스를 떠나며’(마이크 피기스, 1995)의 보드카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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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호 07면

“죽기 위해 술을 마셔요?”(여자·엘리자베스 슈)
“글쎄, 술을 계속 마시기 위해 죽는 건지도 모르죠.”(남자·니컬러스 케이지)

임범의 시네 알코올

마이크 피기스 감독의 1995년 영화 ‘라스베가스를 떠나며’는, 술 마시며 죽어가는 남자의 이야기다. 이혼당하고 회사에서 쫓겨난 것 정도만 영화에 나오지만, 이 남자는 여하튼 심한 알코올 중독자가 돼 버렸고, 삶의 의지를 잃어버렸거나 거의 다 잃어 가고 있는 중이다. 남은 재산 탈탈 털어 현금으로 바꾸고, 그걸로 술 마시다 죽겠다며 라스베이거스로 온다.

그에게 죽음과 술 가운데 어떤 게 목적이고 어떤 게 수단일까. 어려운 질문이다. 알코올 중독자에게 술이 목적이냐 수단이냐… 그렇게 술 마시다 죽으면 그게 고의냐, 미필적 고의냐…. 나까지 머리 아프고 우울해진다. 실제로도 우울한 이야기다. 그런데 고귀한 술을 말하면서 술 먹다 죽는 영화를 끌어와도 될까?

이 영화를 개봉 당시 극장에서 보고 나선 혼자 단골 술집에 가 폭탄주를 마셨던 기억이 난다. 이 정도 영화를 봤다고, 이 정도 협박을 받았다고 내가 술을 끊겠느냐, 어림없다, 자 봐라, 난 마신다! 뭐 그런 객기가 조금은 있었겠지만 꼭 그것만은 아니었다. 영화의 초점은 죽음이 아니라 사람 사이의 관계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그걸 말하기 위해 시작 뒤 15분 동안 남자의 시점으로 진행하다가 타이틀을 올리며, 타이틀이 끝남과 동시에 여자를 등장시키면서 시점을 여자에게로 옮겨 놓는다.

라스베이거스의 창녀인 여자는 가학성 성도착증을 가진 남자 포주에게 시달리며 산다. 그러다가 주인공 남자를 만난다. 마음이 그에게 끌릴 즈음 포주가 죽고 해방된다. 주인공 남자를 자기 집에 들이고 함께 산다. 창녀인 여자가, 술 마시다 죽겠다는 남자를 만나 뭘 해주고 뭘 받을까. 그건 좀 있다 살펴보고, 여하튼 남자는 술 마시다 죽어간다. 어떤 술?

영화가 진행되는 동안 남자는 모든 알코올을 마셔대지만 자세히 보면 분위기에 따라 마시는 술에 차이가 있다. 남자가 라스베이거스에서 차를 몰다 여자와 마주칠 때 마시고 있던 건 맥주다. 둘이 가까운 곳으로 여행을 떠나 유희를 즐길 땐 위스키를 마신다. ‘내 인생 나도 몰라’라는 듯 차를 몰며 술을 퍼부어댈 때, 중독 증세가 심해져 자다가 깨어나 벌벌 떨며 약처럼 술을 마실 때, 후반부에 끝이 얼마 안 남았다는 듯 초췌해진 모습으로 의식을 치르듯 마실 때 그의 손에 들린 건 보드카다.

이 영화에서 보드카는 다른 어떤 술보다 더 죽음과 맞닿아 있다. 왜 그럴까. 두 가지를 꼽을 수 있을 것 같다. 첫째, 보드카의 제조 과정이다. 위스키·럼 등의 다른 스피릿(독주)과 달리 보드카는 증류 과정을 여러 번 거치면서 알코올 농도를 95% 이상까지로 만든 다음 그걸 다시 물에 섞어 원하는 도수로 만든다. 위스키나 럼은 원하는 도수에 맞춰 거기까지만 증류시킨다. 이 때문에 보드카엔 메탄올 찌꺼기 같은 불순물이 거의 없는 대신 위스키나 럼과 같은 특유의 향도 없다.

보드카의 숙취는 다른 술과 확실히 다르다. 내 경우에 보드카를 스트레이트로 많이 마신 다음날엔 머리가 아프거나 비위가 거슬리거나 하는 일은 거의 없다. 대신 어깨와 무릎 관절 같은 곳에 힘이 빠져 연체동물이 된 것처럼 흐느적거린다. 순수 에탄올의 숙취는 자질구레하게 머리나 위장 따위를 건드리지 않고, 곧바로 인체의 기본 에너지를 빼 버린다. 보드카는 마시고 취할 때도, 술 깨면서 힘들 때도 모두 깨끗하고 분명하다. 굳이 죽음과 연관시킨다면 이런 이미지가 낫지 않을까.

둘째는 보드카의 대중적 인기다. 1950년대까지만 해도 보드카는 소련과 유럽 밖에선 시들했는데 70년대 중반 미국에서 버번위스키를 앞서기 시작하더니 21세기 들어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마시는 스피릿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비즈니스 위크’에 따르면 2007년 전 세계에서 183억L의 스피릿을 마셨는데, 그중 보드카가 37억L로 1위며 위스키가 21억L로 2위였다.

단일 브랜드로 보면 럼주인 ‘바카디’가 오랫동안 1위였는데 2006년에 보드카인 ‘스미노프’가 이를 앞질렀다고 한다. 이 두 브랜드에 이은 3위도 최근 수년 동안 ‘앱설루트 보트카’가 지키고 있다(이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남자가 수퍼마켓 진열대에서 내키는 대로 술병을 집어 수레에 담는데 맨 먼저 집는 게 ‘앱설루트 보드카’이다).

위스키에 비해 가격도 싼 보드카는 그만큼 서민적인 술이기도 하다. 밑바닥 인생인 남녀의 곁에 이 술은 어울린다. 둘 다 처참한 처지지만 서로에게 해줄 수 있는 게 별로 없다. 남자가 여자에게 “나더러 술 마시지 말라는 말 하지 마”라고 했더니, 다음날 여자가 조그만 휴대용 술통을 남자에게 선물한다. 남자가 여자에게 천사 같다고 하니까 여자는 “난 당신을 이용하고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보통의 러브 스토리라면 남에게 뭘 어떻게 해주기 위해 발버둥 칠 텐데, 이 영화의 남녀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거꾸로 자기가 원하는 것 앞에 충실하려 하고, 그럼으로 해서 이 둘은 끝까지 함께 있는다.

그런 모습이 딱하고 고맙고, 그걸 보다 보면 살면서 사람에게 바랄 게 많지 않구나, 그래도 사람이 고맙구나, 그런 스산한 위로 같은 게 자기 안에 생기고, 그럴 때 ‘엔절 아이즈’ ‘컴 레인 오어 컴 샤인’ 등 주옥같은 음악들이 흐르고, 결국 목이 칼칼해지고…. 그런 식으로 알코올 중독으로 죽어 가는 이를 보면서 술 생각이 나게 하는 이상한 영화!?

술꾼에겐 모든 게 술 핑계가 될 수 있으니 자제하자.
보드카 얘기가 나왔으니 하나 더. 앞에 말한 스미노프는 1860년대 모스크바에서 설립된 회사인데, 10월 혁명 뒤 이스탄불로, 폴란드로 옮겨 다니면서 상표권 분쟁까지 벌어졌다가 2006년 ‘디아지오’라는 당시 세계 최대 주류회사와 결합했다. 디아지오는 조니 워커, 제이앤비 등의 스카치위스키, 고돈스 진, 베일리스 등의 브랜드를 가지고 있으며 97년 기네스사와 결합해 기네스 맥주 브랜드까지 소유하고 있다.

반면 앱설루트 보드카는 1879년 설립된 뒤 스웨덴 정부에서 국유화해 운영하다가 올 초 파리에 본부를 둔 페르노리카르에 매각됐다. 시바스 리걸, 밸런타인 등의 스카치위스키와 아이리시 위스키 제임슨, 커피리큐르 칼루아 등의 브랜드를 거느리고 있던 페르노리카르는 앱설루트 보드카의 매입으로 디아지오를 제치고 세계 최대 주류회사로 올라섰다.


임범씨는 일간지 문화부 기자를 거쳐 영화판에서 어슬렁거리고 있는 시네필로 영화에 등장하는 술을 연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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