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북리뷰>"못다한 약속"펴낸 故한무숙씨 부군 김진흥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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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당신이 집을 비운 것이 벌써 1백일이 다되었구려.그동안 태양까지 보기 싫어 글자 한 자 못쓰다가 이제야 쓰게 되어 미안하오.』 김진흥(金振興.80.사진)옹의 참회록(?)『못다한 약속』(을유문화사)은 이렇게 시작된다.金옹은 지난 93년 75세로 타계한 소설가 한무숙(韓戊淑)씨의 남편.韓씨는 따뜻한 인간애와 순결의식에 바탕을 둔 여성소설을 일군 인물로 평가받 는 작가다. 金옹은 한일은행장.주택은행장 등 굵직한 자리를 거치며일제시대 이후 한국금융계의 현장을 지켜왔었다.
金옹이 먼저 세상을 뜬 아내를 그리워하며 최근까지 틈틈이 적은 글을 정리한 이 책은 무엇보다 여든의 나이에 죽은 아내에 보내는 연서(戀書)라는 점이 눈길을 끈다.일종의 사부곡(思婦曲)이랄까.마치 풀잎에 맺힌 이슬처럼 연민과 회한의 눈물이 금방이라도 쏟아질 듯하다.고령에 이런 감정이 살아있을까 하는 의심이 들 정도로 마디마디가 읽는 이를 파고든다.
『누덕누덕 기워 신던 당신의 슬리퍼를 보았어요.옆에 아무도 없어 마음놓고 울어 버렸어요.』 金옹은 심지어 우황청심원.면봉,그리고 아이들에게 줄 선물목록이 적힌 메모가 담긴 아내의 핸드백에도 눈가를 훔친다.아내가 차라리 이북땅에 갔다면 통일되는날 만날 수 있을텐데 하는 푸념도 늘어놓는다.가장 힘든 시간은아내가 눈을 감 은 오후 2시40분.
이밖에 자녀들의 근황,추모문집 준비과정,국내외 문단 소식 등을 장문의 편지를 쓰듯 일일이 보고하고 있다.특히 金옹은 어린시절부터 우울한 성격이었던 그를 밝게 되돌렸던 아내를 각별하게기억한다.아내의 출산 당시 자리에서 피한 일,오 랜 병석에 고생할 때 유학길에 오른 무심했던 과거도 뼈아프게 되돌아본다.
이 책의 감동은 단순한 사랑타령이 아니라 金옹의 애절한 심정에서 비롯된다.과장되지 않은 고백과 참회는 오히려 한차원 높은진실마저 느끼게 한다.그는 오히려 아내의 죽음으로 보다 성숙한삶,혹은 사랑의 의미를 체득하게 된다.
그것은 바로 남을 미워하지 않는 마음에 수렴된다.『요즈음 내가 생각하는 것은 미움에 대한 반성이오.모든 욕심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도록 수양을 해야 되겠어요.』 또한 그는 홀로 노년을 보내야 하는 고독과 우울,그리고 당혹감을 낱낱이 독백,잔잔한 슬픔을 자아낸다.
혼자 바둑을 두거나,자정 넘게 집안팎을 서성대거나,간혹 커피로 한끼를 때우거나,혼자 자장면을 사먹는 모습은 인생의 황혼에드리운 삶과 죽음의 고뇌를 웅변으로 보여준다.
오늘날은 갖은 종류의 사랑이 범람하는 시대.드라마.가요.영화가릴 것 없이 가벼운 사랑 이야기가 줄을 이은다.金옹은 이렇게말하고 있다.
『젊을 때의 아기자기한 사랑,관능적인 사랑보다 죽은 아내에 바치는 순수한 사랑이야말로 어떤 사랑보다 강하고 진실한 것이라생각한다.』 사랑의 참뜻과 실천이 무엇인가를 이만큼 솔직하고 생생하게 드러내는 경우는 쉽게 찾기 어려울 것이다.
박정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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